⑥ 그린투데이
⑥ 그린투데이
  • 김현지 기자
  • 승인 2009.10.15 20:43
  • 호수 126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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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만 눈을 낮추면 낮은 곳에서

“다음기회에 좋은 인연으로 만납시다” 라는 문자를 확인한 당시에는 담담했었기에 스스로도 잘 몰랐다. 많이 실망했다는 걸. 나는 9월의 어느 일요일 밤, 거대하고도 불쾌한, ‘나는 아무것도 못할 거야’라는 이름의 괴물에게 짓눌려 몸에 있는 물을 죄다 눈으로 쏟아냈다. 지금 이대로 졸업 해봐도 뾰족한 수가 없다는 생각에 한 학기를 남기고 휴학했다.

 아는 선배가 소개해 주어 잘 될 것만 같아 기대에 부풀었던 광고회사인턴은 면접까지 보고 떨어졌다. 간신히 마음을 추스르고 목표를 바꿨다. 인턴을 해보겠다는 계획은 접고, 일단 한 달에 100만원을 벌자는 목표로 알바 자리에 원서를 잔뜩 집어넣었다.

 바로 연락 온 곳이 자료 입력 알바였다. 면접을 보러 가보니 방배동에 위치한 조그마한 인터넷 신문사다. 면접관은 나의 전공과 신문사경력을 마음에 들어 했다. 게다가 휴학생이라 장기근무도 가능하니 1주일만 알바로 해보고 인턴으로 전환하란다.

그래서 얼떨결에 인턴이 됐다. 작은 인터넷 신문사에서 내게 원하는 일은 그렇게 거대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남들보다 1시간 일찍 나와서 책상정리를 하고, 재떨이를 비우고, 컵을 씻었다. 그리고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서 각 부처의 보도 자료를 긁어다가 붙여넣기를 했다.

하루에 8시간을 컴퓨터 앞에 앉아있고, 3시간 출퇴근 버스에 앉아 있다 보니 내 몸이 앉은 자세로 망부석이 되어 버리는 건 아닌가 싶었다. 나는 나름 만족하며 일을 했지만 내가 온지 1주일 쯤 지나서 온 알바생은 그렇지 않았나보다.

 첫날 와서는 다짜고짜 나더러 이런데서 계속 일 할 거냐며 이런 단순 노무만 할 수는 없지 않느냐며 열변을 토하더니 다음날부터 안 나왔다. 오랜만에 만난 내 또래 여자였는데 그렇게 보내버리고 나는 다시 혼자 일을 했다.

 처음에는 글만 긁어오다가 다음에는 사진 올리고 그 다음에는 동영상을 올렸다. 사실 나는 일하기로 한 4개월 내내 단순히 보도자료 긁어오는 일만 하게 될 줄 알았는데 그 일도 익숙해지자 속도가 붙었고 더 이상 올릴 것이 없어졌다. 그러자 국장님은 내게 보도 자료를 편집하게 했다. 각종 행사 정보만 던져놓은 보도 자료를 말이 되도록 편집하니 내 이름이 붙은 기사가 되었다. 재미가 붙었다.

 그렇게 조금씩 단계 단계를 밟으며 배워가는 재미가 쏠쏠했다. 다음엔 내가 직접 취재도 하고, 어떤 사안에 대해 생각을 정리해서 칼럼도 써보고 싶었다. 아직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내가 진득하게 가장 아래 단계에서부터 일할 수 있었던 것은 눈을 낮췄기 때문인 것 같다.

인턴 지원했던 광고회사 면접에서 “회사가 작아서 잡일도 맡아서 해야 해요. 정수기 물통도 갈아 끼워야 하는데 힘은 좀 세요?”라고 물었을 때, ‘아니, 내가 광고 배우러 가는 거지, 물통 들러 가나? 나 이래봬도 곱게 자란 딸이야. 월급도 쥐꼬리만큼 주면서!’라는 말이 목구멍까지만 올라왔었다. 지금에 와서야 말이지만 그런 생각을 가지고는 들어갔어도 못 버티고 나왔을 거다. 얼마 전 나간 그 알바생처럼 말이다.

 오늘도 보도 자료를 검색하다 보니, “구직자 73.9%, 취업스트레스 심각”이라는 기사가 있다. 그럴 거다. 나는 아직 졸업생도 아닌데 인턴이 안 구해져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그럴 땐, 조금만 더 기준을 낮춰보는 건 어떨까. 조금 더 낮은 곳에서 점점 올라가는 재미를 느껴보는 것도 좋은 방편이다.

김은비(언론영상·4 휴학)

김현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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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nhasu@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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