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정민시를 위한 제문
(32) 정민시를 위한 제문
  • 김문식(사학) 교수
  • 승인 2009.11.10 17:20
  • 호수 126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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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복 정민시의 죽음을 애도하며 직접 쓴 제문, 저승에서 다시 일어나게 할 수 없음을 탄식하노라

[김문식(사학) 교수의 21세기에 만나는 정조대왕]     

  아, 며칠 전 아침 바람에 정을 따라 충문공(忠文公) 서명선(徐命善)의 영령에 제사를 드렸다. 저 관서(關西) 지방의 들판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는데 다시 경에게 술을 따르게 되었다. 정신은 모여 있지만 장수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한 것을 애석해하니, 강호의 한 가지 병통은 흘러가는 물처럼 멈추지 않는 것임을 어찌하랴?

    아, 내가 세손으로 있을 때부터 서로 사귐이 깊어 『춘추』에서 명분과 의리를 토론하였고, 피를 뿜고 쓸개가 파헤쳐져도 원수들과 함께 살지 않겠다고 맹세했는데, 선왕(영조)의 해와 달처럼 밝은 보살핌을 얻게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인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파도가 가라앉으면 돌이 드러나듯이, 그윽한 하늘을 바라보면 거마(車馬)와 누대(樓臺)가 화려하고 성대한 것은 잠시 동안의 영화에 불과하다. 국사를 위하고 공무에 힘쓰며 자기 몸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 않는 사람이어야 후세의 이름을 남길 수 있으니, 경이 여기에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 저승으로 돌아가는 길이 편안할 것이다.

 

  옛날 당나라 태종이 진부(秦府)의 옛사람이 생각나 한밤중의 종소리를 차마 듣지 못했는데, 나도 새벽에 베개를 밀치고 일어나 배회하다가 보면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진다. 아, 천고의 긴긴 밤에 한바탕 꿈같은 인생이구나. 봄을 맞이한 강은 아득히 넓고, 산골짜기 새들은 사방에서 지저귀는데, 지난 일을 생각하며 상심에 잠겼다가 저승에서 다시 일어나게 할 수 없음을 탄식하노라.

 

 

▲정조 어필의 정와정공민시지장(靜窩鄭公民始之藏). '정와(靜窩)'는 정민시의 호이다.

 

  정조가 1800년 3월에 사망한 정민시(鄭民始)를 위해 작성한 제문인데, 원 제목은 ‘증 우의정 내각제학 충헌공 정민시 치제문(贈右議政內閣提學忠獻公鄭民始致祭文)’이다. 정민시는 사망하기 직전에 내각(규장각)의 제학이자 판돈녕부사로 있었는데, 정조가 그의 공적을 평가하여 우의정 벼슬을 추가하고 ‘충헌(忠獻)’이란 시호를 주었기 때문에 이런 제목이 되었다.

 

  정민시는 1773년 문과에 급제하고 이듬해 세자시강원의 관리가 되면서 정조를 처음으로 만났다. 세자시강원은 세손이자 동궁이었던 정조의 교육을 전담했던 관청이다. 이때부터 정조와 정민시는 서로의 뜻을 알아주는 지기(知己)가 되었는데, 1775년 영조가 세손의 대리청정을 명령하면서 정조에게 정치적 위기가 닥치자, 정민시는 홍국영, 서명선과 함께 목숨을 걸고 정조를 보호하여 국왕이 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정조가 즉위한 후 정민시는 중앙의 고위직은 물론이고 지방관으로도 크게 활약했는데, 특히 국가의 재정을 담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글에서 정조는 세손 시절에 정민시를 처음 만났던 일과 대리청정 사건이 일어났을 때 정민시가 홍인한의 계략을 미리 알아차리고 자신을 보호한 사실을 언급했다. 또한 정민시가 국가의 재정을 담당하면서도 부귀와 사치에 빠지지 않고 절도 있는 생활을 하여 큰 공적을 남겼으니, 저승으로 가는 길이 홀가분할 것이라 위로했다.

  그러나 정민시의 사망은 정조에게 큰 슬픔이었다. 이 무렵 정조의 측근들은 하나둘씩 세상을 등졌는데, 노론과 남인의 영수였던 김종수와 채제공이 1799년에 세상을 떠났고, 세손을 보호했던 세 사람 중에는 정민시만 남아 있었다. 그런데 정민시까지 사망하자 정조는 슬픔에 잠겼는데, ‘한 밤중에 잠에서 깨어나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린다’,  ‘천고의 긴 밤에 한바탕 꿈같은 인생이라’는 문구에서 이를 느낄 수 있다.

 

  정조는 정민시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당일에 우의정 벼슬을 추가했고 즉시 시호를 의논하게 했다. 또한 장례식에 필요한 비용을 두 배로 지급하고, 삼년치의 녹봉을 보내며, 정민시의 삼년상이 끝나면 그 자제를 관리로 등용하라고 명령했다. 정조는 정민시의 비문을 직접 어필로 써 주었는데, 수십 년 동안 신뢰한 동료이자 충실한 신하였던 정민시의 장례식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김문식(사학) 교수
김문식(사학) 교수

 dkdd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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