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양현전심록 서문
(33)양현전심록 서문
  • 김문식(사학) 교수
  • 승인 2009.11.17 17:17
  • 호수 126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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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와 송시열의 조응하는 심법(心法), 정조는 송시열의 학문을 통해 주자학을 이해

[김문식(사학) 교수의 21세기에 만나는 정조대왕]

     
  나는 우리나라에 선정(先正) 우암(尤菴, 송시열)이 있는 것은 송나라에 주자(朱子)가 있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학술이 순정하고, 규모가 웅장하며, 대의가 해와 별처럼 빛나고, 성인의 도로 나아가는 장애물을 제거한 것에서는 다른 점이 없다.


  다른 점을 보자면 선정(송시열)은 다행히도 효종의 시대에 태어나 아는 것을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관직에 임명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각종 조치들을 진술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 때문에 소인들의 유감이 쌓이고 풀리지 않아 결국 초산(楚山, 정읍)에서의 화를 당했다. 주자는 불행하게도 송나라 효종의 시대에 태어나 말하면 배척되는 것이 많았고, 관직에서 쫓겨난 것이 많았으며, 각종 조치들은 저지되고 좌절되는 것이 많았다. 이 때문에 소인들의 유감이 풀리고 쌓이지 않아 끝내 고정(考亭)에서 편안한 죽음을 맞았다. 이는 다르면서도 같은 것이니, 사실 같으나 다르나 하나도 다를 것이 없는 것은 심법(心法)이 같기 때문이다.


  아, 지금은 주자의 시대에서 4백여 년, 선정의 시대에서 백여 년이 지나갔다. 이론(異論)이 끊임없이 떠들썩하고 그릇된 논의는 더욱 기세가 올라, 두 사람의 같은 점을 같다고 하지 않고, 다른 점은 차이가 무엇인지 따져보지 않는다. 성덕(盛德)과 광채가 서로 비슷한 것도 대부분 가려져 드러나지 않았는데, 하물며 미묘한 심법이 같은 것을 장차 어디서 살피겠는가? 역시 ‘그 사람의 시를 외우고 그 사람의 글을 읽으면 그 사람됨을 알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내가 두 사람의 문집에서 심법이 조응하는 것으로 서간문에서 몇 편, 봉사(封事)와 주소(奏疏)에서 몇 편, 잡저(雜著)와 서문 발문에서 몇 편, 시(詩)와 부(賦)에서 몇 편을 뽑고, 이를 합해 한 책으로 만들어 ‘양현전심록(兩賢傳心錄)’이라고 했다. (중략)


  내가 듣기에 주자의 무이(武夷) 계곡과 송시열의 화양(華陽) 계곡이 사람을 만나기 전에는 다 같이 무너지고 초목이 무성했다가, 사람을 만난 이후에는 다 같이 빼어나고 물결이 넘실거리는 곳이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하늘이 만들고 땅이 감추면서 그 주인을 기다린 것인데, 심법에 다른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심법이 같으면 하늘과 땅도 어긋나지 못하는데, 하물며 사람이 어떻게 하며 또 후세에 어떻게 하겠는가? 이 때문에 서문을 쓰는 것이다.

▲정조가 작성한 양현전심록 서문.

  정조가 1795년에 작성한 ‘양현전심록의 서문(兩賢傳心錄序)’이다. 정조는 세손 시절이던 1774년에 주자와 송시열의 글에서 취지가 같은 것을 뽑아서 책으로 편찬했다. 책의 이름은 ‘양현전심록(兩賢傳心錄)’인데, 양현(兩賢) 즉 주자와 송시열의 심법을 전하는 기록이라는 뜻이다. 정조는 책의 서문을 두 번이나 작성했는데, 이 글은 나중에 작성한 서문이다.


  정조는 송시열의 학문을 통해 주자학을 이해했는데, 두 사람의 글이 매우 흡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행적은 매우 달랐다. 주자는 송나라 효종에게 발탁되지 못해 생전에 뚜렷한 공적을 남기지 못했지만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가 있었다. 반면 송시열은 조선 효종에게 발탁되어 많은 공적을 남겼으나 반대파의 미움을 받아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사망했다. 그러나 정조에게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의 행적에 보이는 차이가 아니라 두 사람의 심법이 동일하다는 점이었다.


  정조는 당시 사람들이 두 사람의 행적은 물론이고 심법이 같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두 사람의 문집에서 취지가 같은 글을 뽑았는데, 『맹자』에 나오듯이 그 사람의 시를 외우고 글을 읽힘으로써 그 사람을 이해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정조는 당시 사람들에게 주자와 송시열의 글을 읽혀 그 심법을 이해하게 하면 혼란한 사회를 안정시키고 잘못된 학설을 종식시키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이를 보면 정조는 학문적 기반을 주자학에 두고 있었다.

김문식(사학) 교수
김문식(사학) 교수

 dkdd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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