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의 작지만 따뜻한 풍경 때문일까?
골목 굽이를 돌아서면 금방이라도 그리운 얼굴이 나타날 것만 같다
골목길 접어들 때에 내 가슴은 뛰고 있었지. 커튼이 드리어진 너의 창문을 말없이 바라보았지(김현식의 노래 『골목길』). 누군가는 가슴 뛰는 첫사랑을, 또 누군가는 친구들과 해질녘까지 뛰어놀던 기억이 있을 골목길. 무미건조한 도시, 팍팍한 생활 속에서 우리는 까맣게 잊고 살았다. 한번 사라진 풍경은 다시 살려낼 수 없고 자취를 감추고 나서야 비로소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골목길은 이제 정말 몇 군데 남지 않았다. 서울 시내에서 일정한 면적을 골목길로 지킨 동네는 열 군데 안팎에 불과하다. 그중에 한 곳이 바로 한남동 ‘해맞이길’이다.
‘해맞이길’은 동쪽에서 올라오는 해를 맞이한다는 뜻이다. 물론 주로 동향이라 아침에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기 때문에 ‘해맞이길’이라고 지은 이름이 완전히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침 해도 잠시, 이내 그늘이 드리운다. 골목의 경사가 급하고 시야는 막혀 있어 더 그렇다. 이렇게 볼 때, ‘해맞이길’이라는 이름은 한편으로 해를 그리워하는 분위기가 함축되어 있는 것 같다. 그나마 공터가 동네 전체에 깊숙하게 퍼져 있어 햇빛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받을 수 있다. 곳곳에 공터가 생긴 가장 중요한 목적은 햇빛이 잘 안드는 상황을 만회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해가 잘 들지 않아 사람들이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어 자칫 가라앉을 수 있는 동네 분위기를 끌어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해맞이길 열여섯 갈래는 모두가 제각각이다. 둔각으로 휜 길, 곡선으로 휜 길, 직각으로 꺾인 길, 휘어 돌다 뻗어나가는 길, 예각으로 꺾인 길, 뱀처럼 구불구불한 길, ㄷ자형 길, ㅁ자형 길, ㅅ자형 길 등 제멋대로 나있다. 갖가지 길들은 아무래도 사람의 굴곡진 인생살이를 흉내 내는 것 같다. 또 제각각 뻗은 골목길에선 집 밖에 널어놓은 빨래가 기분 좋게 말라가고, 청국장 끓는 냄새가 퍼지고, 가끔 개가 멍멍 짖고, 어디선가 피아노의 뚱땅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골목길이 가장 아름답게 다가올 때다.
구슬치기, 술래잡기에 신이 나 있는 아이들, 학교 끝나고 두서넛씩 떼를 지어 장난치며 걸어오는 개구쟁이 남학생들, 혼자서 새침하게 걷는 단정한 교복의 단발머리 여학생, 장사를 마치고 좁은 골목에서 능숙하게 리어카를 끌며 집으로 돌아가는 행상 아저씨, 화려하진 않지만 마음을 포근하게 해주는 창틀 위 화초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만들어 놓은 정겨움. 한남동 ‘해맞이길’에서는 이 같은 작지만 따뜻한 풍경들을 들여다 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골목굽이를 돌아서면, 금방이라도 그리운 얼굴이 나타날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