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한국도자기 르네상스를 그리며
박종훈 교수 도예전에 대한 단상
[기고] 한국도자기 르네상스를 그리며
박종훈 교수 도예전에 대한 단상
  • 장두식(동양학연구소) 연구교수
  • 승인 2009.11.19 16:21
  • 호수 126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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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의 역사는 BC 10000년경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흙을 불에 구워 생활에 필요한 기물을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바로 문명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유럽인들이 자기를 차이나로 호칭하는 것과 같이 자기는 중국의 한 시대 때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당시대 때 실크로드를 통하여 유럽으로 수출되면서 인류의 이기(利器)로 보편화되었다. 한국은 중국의 자기를 받아들여 고려 때 청자를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고려 도공들은 중국 청자를 더욱 발전시켜 비색과 상감기법을 통하여 독자적인 청자를 완성하였다.

그 후  한국의 도자기는 고졸한 분청사기와 푸른빛을 머금은 백자로 이어지게 된다. 고려와 조선의 도자기들은 중국 도자기와 버금가는 하이테크를 가지고 있었지만 세계화에 실패하여 인류 문명사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임진왜란 때 납치한 조선의 도공을 통해 도자기 하이테크를 습득한 일본이 오히려 17세기 후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통해서 아리타도자기를 유럽에 수출함으로써 도자기 선진국이라는 명성을 차지하게 되었다. 도자기 하이테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크게 발전을 할 수 없었던 한국의 도자기는 해방과 더불어 부활의 몸짓을 하게 되었다.

청자의 비색을 계승하기 위한 노력과 맥이 끊긴 조선  막사발을 재현하기 위해 흙을 찾아 전국을 떠도는 발걸음들이 많아지면서 중흥기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전통 도자기의 맥을 잇고자 하는 노력과 함께 “도예(陶藝)”라는 새로운 담론이 형성하게 되었다. 도예란 담론 속에는 온고지신(溫故知新) 혹은 법고창신(法古創新)이 함축되어 있다. 근대 이후 도자기는 기물로서만 만족하지 않고 미술과 디자인의 영역까지 확산되었다. 이러한 추세에 상응하여 전통적인 도자기의 계승에서 한걸음 나아가 작품으로서의 도자기를 창조하기 위한 예술행위가 바로 도예라고 정의할 수 있다. 

▲박종훈(도예과) 교수
11.11~17일까지 가나 아트스페이스에서 도예전을 하고 있는 박종훈 교수의 작업을 통해서 우리는 도예의 본질을 발견할 수 있다. 한국 도예의 원로이신 김석환 선생에게 사사를 받은 박교수는 전통 도자기에 맥을 두고 있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새로운 도자기를 지향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작업은 전통의 단절이 아니라 전통의 계승이다. 전통이란 과거의 것을 고스란히 이어받는 것이 아니라, 인습적인 것을 버리고 현재에 적합한 것과 당대의 가치를 융합시키는 것이다. 1986년 첫 개인전부터 오늘까지 그는 맹렬하게 새로움을 추구하면서 한국 도자기의 전통을 지열하게 계승하여 왔던 것이다.

그는 “흙작업은 마임이다. 혼자 읽는다. 칭찬도 박수도 없다. 그런데 거기엔 다 있다”라고 말하곤 한다. 도자기를 만드는 작업은 도예가의 고독한 작업이지만 그가 창조해 낸 도자기 속에는 인간이 희노애락(喜怒哀樂)이 함축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의 뽀얀 달항아리나 분청완을 가만히 내려다 보면 이상하게 가슴이 뭉클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도자기는 가마 속에서 흙과 불이 만나서 만들어진다. 하지만 흙과 불 이전에 도예가의 땀과 눈물과 웃음이 토대가 된다는 것을 사람들은 잘 모른다. 그는 이러한 도자기의 본질을 통찰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그러한 도자기를 창조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한국의 도자기는 중국과 일본이라는 어두운 그늘에 덮여 있었다. 하지만 한국의 수많은 도예가들에 의해서 짙은 그늘이 서서히 걷히고 있다. 37년 동안 흙작업을 하였지만 “아직도 만들 것이 많다”라고 강조하고 있는 박종훈 교수의 작업 또한 그늘을 걷는데 일조를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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