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유성룡에 대한 평가
(33)유성룡에 대한 평가
  • 김문식(사학) 교수
  • 승인 2009.12.01 17:28
  • 호수 126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유성룡, 죽어서도 국가에 이로운 일을 하다.

[김문식(사학) 교수의 21세기에 만나는 정조대왕 ]    

유성룡의 견해 반영 장용영 설치, 화성 건설


내가 고 상신(相臣) 유성룡(柳成龍)에게 감회를 일으키는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다. 요즈음의 풍기(風氣)는 나날이 얇아지고 인재는 갈수록 등급이 낮아져, 나가거나 물러나는 움직임이 모두 쓸데없는 형식에 얽매여 있다. 그런데 세상을 다스리는 큰 법칙, 전례(典禮)와 음악, 병사(兵事)와 농정(農政)에 대한 일들을 가슴 속에 잔뜩 쌓아두고 있다가 상자를 거꾸로 기울인 듯 쏟아내었으니, 고 상신 같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던가?

일찍이 그의 유집(遺集)을 가져다 보고 이를 뽑아서 실용(實用)에 쓰려고 생각하였다. 근기(近畿) 지역의 여러 읍들에 군사 1만 명을 양성해야 한다는 설은 암암리에 장용영(壯勇營)의 새 제도와 합치되었는데, 내가 장용영을 설치하고 시행하는 규모를 그에 의거하여 실시한 것이 많았다. 화성(華城)을 쌓을 때에는 장수(丈數)를 계산하고, 높고 낮은 것을 측량하며, 토산물을 바치는 거리를 따져보고, 담장들을 우뚝하게 하며, 사거리를 질서 있게 배치하였다. 그런데 여러 사람들이 마음을 모아 성곽을 완성한 것이 독려하는 북소리를 이긴 것은 고 상신이 남겨 준 계책에 의거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몸이 당대에 등용되었을 때에는 고위 관리로서의 계획이 명나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고, 말이 후세에 전해지면서 계획한 방안들은 지금까지 국가를 이롭게 한다. 산천은 예전과 같고, 모범이 되는 행동은 멀지 않은데, 전해지는 명성과 남은 공적은 사람을 탄식하게 하면서 저승에 있는 이를 생각하게 하니, 이 어찌 얕은 견해나 미미한 간언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겠는가? 『국어(國語)』에 “용마루를 두텁게 하지 않으면 무거움을 떠맡을 수 없다. 무겁기는 국가만한 것이 없고 용마루는 재능만한 것이 없다”라고 하였는데, 혹시라도 고 상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드물 것이다.

▲유성룡의 위패를 모신 병산서원.


정조가 1794년에 작성한 글인데, 원 제목은 ‘문충공 유성룡의 집안에 보관한 명나라 장수들의 서화첩에 쓰다(題文忠公柳成龍家藏皇朝諸將書畵帖)’이다. 이 때 승지 이익운은 왕명으로 경상도 지역에 나갔다가 그곳의 명가(名家)에서 보관하고 있던 귀중한 서적들을 조사해 가지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 중에는 임진왜란 때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이 이여송(李如松)을 비롯한 명나라 장수들과 주고받은 편지를 모은 서간첩 2첩과 명나라 장수에게 받은 그림을 편집한 시화첩 1첩이 있었는데, 정조는 이를 열람하고 서문을 써 주었다. 


정조는 이 글을 남인의 영수인 채제공이 베껴 쓰고, 유성룡의 후손인 유태좌가 가지고 가게 했다. 정조는 유성룡의 행적을 보면서 특별한 느낌을 가졌는데, 그가 나라의 형편이 어려울 때 영의정을 맡아 국가를 경영하는 방안을 내 놓은 것이 남다른 데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조는 시대의 분위기나 인재의 수준이 점점 떨어져서, 자신의 신하들은 벼슬길에 나아가고 물러가는 의리만 따졌지 실제로 세상을 다스리는 방법이나 실무에는 유능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정조는 유성룡의 문집인 『서애집(西厓集)』을 읽으면서 국가를 경영하는데 참고할 것이 많음을 알았다. 정조는 특히 장용영(壯勇營)을 설치하고 화성(華城)을 건설하면서 유성룡의 견해를 많이 참고했는데, 장용영은 서울을 둘러싼 수도권 지역에 1만 명의 군대를 양성해야 한다는 유성룡의 주장을 받아들인 것이고, 유성룡의 견해를 따라 화성을 건설하자 백성들이 축성 공사에 기꺼이 참여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정조는 1797년 1월에 공사가 마무리된 화성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는데, 이때에도 유성룡의 견해를 수용하여 장용영을 설치하였음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정조는 유성룡이 살아서는 명나라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국가의 위기를 극복했고, 죽어서도 국가에 이로운 일을 한 것으로 평가했다. 정조는 오랫동안 꿈꾸었던 개혁정치를 추진하면서 유성룡처럼 국가의 일을 떠맡을 수 있는 유능한 인재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문식(사학) 교수
김문식(사학) 교수

 dkdds@dankook.ac.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