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춘당대의 과거 시험
(36)춘당대의 과거 시험
  • 김문식 교수
  • 승인 2010.01.11 14:54
  • 호수 126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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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나라 제도를 중시하여 이루어진 과거시험, 인일제

훌륭한 인재를 뽑는 일은 국왕의 급선무

경신년(1800) 봄에 과거를 실시하여 선비를 뽑은 것은 경사를 기념하기 위해서이다. 초시는 시험장을 세 곳으로 나누었다. 첫 번째 시험장은 남궁(南宮, 예조)인데, 중추부를 지나서 광화문 밖에 이르고, 한성부 앞길에 닿기까지 성을 이루었다. 응시자는 30,598인, 시권(試券)을 바친 사람은 13,737인이다. 두 번째 시험장은 태학의 비천당(丕闡堂)인데, 대성전(大成殿)의 문밖에 이르고 향교(香橋)에 닿았다. 응시자는 39,870인, 시권을 바친 사람은 10,520인이다. 세 번째 시험장은 명륜당(明倫堂)인데, 식당의 다리에 이르고 벽송정(碧松亭)에 닿았으며 성을 이룬 것은 다른 곳과 같았다. 응시자는 39,370인, 시권을 바친 사람은 14,357인이다. 세 곳을 합하면 응시자는 111,838인, 시권을 바친 사람은 38,614인데, 과거를 시행한 이후 관광인(觀光人, 과거를 보는 사람)의 숫자가 이렇게 많은 적이 없었다.


인일제(人日製)는 다음날에 치러졌다. 시험장을 춘당대(春塘臺)에 설치했는데, 관덕정(觀德亭)에서부터 관풍각(觀   閣)에 이르렀다. 응시자는 103,579인, 시권을 바친 사람은 32,884인인데, 서울 2,211인, 경기 3,586인, 해서(황해) 3,111인, 관서(평안) 3,173인, 호서(충청) 6,096인, 관동(강원) 1,025인, 호남(전라) 4,700인, 영남(경상) 5,231인, 북관(함경)은 관동과 같은 1,025인, 화성 368인, 광주 356인, 송도(개성) 210인, 강도(강화) 90인, 제주 3인, 거주를 기록하지 않은 사람 766인이다. 참으로 장관이라 하겠다.


호경(鎬京, 주나라 수도) 벽옹(     , 태학)의 동서남북에 부(賦) 제목을 내걸고, 서울과 지방에서 장원 1인씩을 뽑아 급제시켰다. 다음 삼하(三下) 점수를 받은 100인에게 초시에 합격시켰는데, 서울 10인, 경기 10인, 해서 8인, 관서 8인, 호서 11인, 관동 7인, 호남 11인, 영남 11인, 북관 8인, 강화 5인, 광주 3인, 송도 3인, 강도 3인, 제주 2인이다. 그 아래 차상(次上) 점수를 받은 사람에게 각각 상을 주었는데 서울과 지방의 비율은 삼하의 예를 따랐지만 제주에서 1인을 빼고 화성에 1인을 더했다. 시권을 매긴 후 합격자 발표는 해서 관서 호서를 먼저하고, 다음에 관동, 다음에 호남과 영남, 다음에 북관으로 했는데, 이는 『시경』 본장에서 말한 서동남북의 순서를 따른 것이다.

 

정조가 1800년 3월 22일에 작성한 글인데, 제목은 ‘춘당대에 행차하여 인일제를 실시하고 읊다(御春塘臺設人日製有吟)’이다. 여기서 인일제란 성균관 유생에게 매년 보이던 네 번의 시험을 말하는데 3월에는 삼월 삼진날을 기념하는 시험이 있었다. 정조는 혜경궁 홍씨의 병이 나은 것을 기념하는 경과(慶科, 경사를 축하하는 과거)도 함께 실시했는데, 경과는 3월 21일, 인일제 시험은 그 이튿날에 치러졌다.

이때의 행사에서 흥미로운 것은 응시생의 숫자가 이례적으로 많았다는 점이다. 두 시험 모두 10만 명 이상이 응시했고 답안지를 제출한 사람도 3만 명이 넘었다. 이 때문에 시험장도 세 곳으로 나눴는데 해당 건물은 물론이고 인근의 공간까지 응시생으로 메워졌다. 이를 본 정조는 장차 학문이 크게 일어날 조짐이라며 기뻐했다.

정조는 주나라의 제도를 중시했는데, 시험 문제를 성균관의 사방에 내건 것이나 합격자 명단을 서동남북의 순으로 발표한 것은 모두 주나라 방식을 따른 것이었다. 정조를 비롯한 당시의 학자들은 주례(周禮), 즉 주나라의 제도가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다. 정조는 지역을 안배하여 합격자를 뽑았다. 급제자 두 명은 서울과 지방에서 한 명씩 뽑았고, 차점자 백 명과 그 다음 백 명은 출신 지역을 서울, 전국 팔도, 네 곳의 유수부로 구분했는데, 각 지역의 인구와 응시생 숫자를 따져서 합격자를 선발했다.

이 무렵 정조는 동구릉을 참배하고 돌아와 몹시 피곤한 상태였다. 그렇지만 정조는 이틀 동안의 과거 시험장을 떠나지 않았는데, 훌륭한 인재를 뽑는 일은 국정을 담당하는 국왕의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김문식 교수
김문식 교수

 dkdd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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