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만의 출자에 관련된 쟁점에 대한 재검토
위만의 출자에 관련된 쟁점에 대한 재검토
  • 이민호 기자
  • 승인 2010.01.17 01:36
  • 호수 1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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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조선열전을 중심으로

Ⅰ. 머리말

『史記』「朝鮮列傳」에서 고조선 멸망과정에 대한 설명은 비교적 자세한데 반해, 위만의 출자와 관련된 기록은 “朝鮮王滿者, 古燕人也”뿐이다. 外國民族의 始原이나 내부사정에 대한 상태서술은 疏略하고 대체로 중국과 직접 관련이 있는 부분만을 記述했던 當代 중국인의 서술태도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최소한으로 알 수 있는 사실은『史記』․『鹽鐵論』․『前漢書』․『魏略』등 여러 史書에서 위만이 漢代 初에 燕지역에서 망명해왔다고 傳하고 있어, 그가 燕지역에 살던 인물이라는 점이다. 학계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를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특히 위만의 출자와 관련해서는 이를 古朝鮮系 流民으로는 보는 견해와 漢系 燕人으로 보는 견해가 서로 대립하며 妥協點을 찾지 못하고 있다. 筆者는 세 가지 狀況이 양자 간의 타협점을 찾는데 妨害가 되고 있다고 본다. 첫째는 위만의 출자에 대한 연구가 史料에 의거한 的確한 논증보다는 위만이 조선인이어야 한다는 當爲性에 의거해 연구가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둘째는 위만의 출자가 그가 建國한 위만조선의 국가적 성격에 미치는 영향성을 過大評價했다는 점이다. 셋째는 고대동아시아의 한 구성분자로서 위만조선이 記述되었다는 사실을 看過하고 他 史料와의 비교연구가 미흡했다는 점이다. 筆者는 이러한 문제를 염두에 두고서 본고에서 『史記』「朝鮮列傳」을 중심으로 하여, 위만의 출자에 관한 논쟁이 발생하는 부분을 재검토해 보고자 한다. 아울러 논쟁부분에 대한 筆者 나름대로의 견해를 開陳해 볼 것이다.

 Ⅱ. 위만의 姓에 대한 견해에 대한 검토

最初의 史料인 『史記』에는 단순히 “朝鮮王滿者, 古燕人也”라고만 기록되어 있을 뿐 위만의 성씨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없다. 위만의 姓은 『史記』 이후 200년, 그가 즉위한 후 300년이 지나서야 『後漢書』,『潛夫論』에 나타난다. 이에 대해서 이병도는 『史記』에서 위만의 성이 빠져있는 이유를 중국의 사서 편집자들이 등장인물의 성을 省略하는 습관에 起因한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사실상 이것은 본문에 그 인물이 여러 차례 언급될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이다. 따라서 周나라 때부터 중국 성씨로 간주되어왔고, 가장 흔한 中國系 성이었던 ‘衛’라는 성은 위만이 중국출신임을 증명하기 위해 붙여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서영수는 원래 ‘滿’은 조선에서 임금을 尊稱하던 고유어의 借字인데, 조선의 고유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였던 중국학자들이 위만을 중국계 流民으로 단정하고 후대에 ‘위’라는 성을 添加하였다고 주장한다. 박시형 또한 한국의 역사적인 인물들이 보통『三國志』의 ‘禮’, 『史記』의 ‘最’ ․ ‘參’ 등과 같이 한 자나 두 자로 표기되어 있는 것에 주목하면서, 이것은 중국인들이 고대에 한국어의 고유 명사 체계를 알지 못하여 이름만 부여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는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筆者는 위만의 성이 ‘위’가 아닐 수 있다는 견해에 同意한다. 우선 최초의 사료인 『史記』의 卷 115, 「朝鮮列傳」과 卷 130, 「太使公自序」에는 위만의 성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마천이 『史記』에서 모두 인물들의 성을 省略했다고 한다면 위와 같은 筆者의 견해는 허약한 추측이 될 것이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라면 위만의 성이 ‘위’가 아닐 가능성이 더욱 커진다고 할 수 있다. 남월왕 尉佗는 진정 사람으로 성은 趙씨이다. 위의 記事를 보면, 사마천은 南越王 尉佗의 ‘尉’가 ‘佗’의 성이 아님을 밝혀 두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위만의 성이 ‘위’가 맞았다면, 사마천은 남월왕의 경우처럼 위만의 성을 밝혔을 것이다. 사마천이 위만의 성을 생략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筆者의 이와 같은 견해는 하나의 假定이지만 적어도 ‘위’가 ‘만’의 성씨라는 단정을 再考하게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Ⅲ. 위만과 노관의 관계에 대한 검토

盧綰이 배반하여 匈奴로 들어가니, 만이 망명하여 천여 명의 무리를 모아 추결을 하고 만이의 복장을 하고서 동쪽으로 가서 요새를 나와 패수를 건넜다. 위 記事의 문맥을 살펴보면, 위만의 망명은 노관의 謀反 및 匈奴로의 도망과 어떤 연관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연유로 해서, 일찍이 위만을 燕王 노관의 부하로 誤認했던 까닭에 위만조선을 전통시대에는 찬탈왕조로, 근대에 와서는 일본학계에 의해 중국유민에 의한 식민정권으로 罵倒되기도 했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이 같은 견해는 위만의 출자에 관한 『史記』의 정밀한 분석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마천이 위만과 노관의 관계에 대해서 언급한 사실이 전연 없음에도 이와 같이 주장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추측에 의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史記』「列傳」의 일반적 서술은 표제의 인물과 관련된 중요한 인물에 대한 附傳을 다는 것이 보통인데 『史記』의「盧綰列傳」에는 위만에 관한 기록이 全無하다는 사실은 이를 反證한다고도 볼 수 있다. 더욱 중요한 점은 설사 三上次男의 주장처럼 위만이 노관의 부하였다고 가정하더라도 위만의 출자에 대한 설득력 있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요동지방은 戰國時代 燕, 秦의 침입이 있기 전에는 조선의 서부지방이었기에 그곳에는 조선인 계통의 후예인 燕人이 상당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고조선인이 燕에 服務하지 않았다고 가정하기는 어렵다. 실제로 중국인이 아닌 異民族이 燕에 外交使臣으로 활동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기록도 전해지고 있다.

 Ⅳ. 魋結과 蠻夷服에 대한 견해의 차이 검토

위만의 출자와 관련하여 이를 고조선계 유민으로 보는 견해의 중심에는 이병도가 1956년 前揭論文을 통해 발표한 ‘衛滿朝鮮人’ 說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설은 논문이 발표된 이래, 數多한 개설서와 많은 史家들에 의해 거의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설의 가장 핵심적인 論據는 북상투와 오랑캐 옷에 대한 그의 견해이다. 이병도는 위만이 西漢으로부터 망명할 때 북상투와 오랑캐 옷을 입었다는 기록에 근거하여 북상투와 오랑캐 옷이 古朝鮮人의 머리모양과 服飾을 뜻할 것이라고 해석하고 ‘위만이 조선의 風俗을 따른 것으로 보아 그는 순수한 漢人系統이 아니라 朝鮮人系統의 후손이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해석일 것’이라고 하였다. 이 같은 견해에 대해 이종욱은 실제로 위만이 조선에 망명한 후에 거느리게 되는 사람들 중에는 眞番과 朝鮮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史記』에 나오고 있는 蠻夷服은 고조선인들이 입었던 옷이라 생각되지만, 『魏略』의 기록에는 위만이 胡服을 하고 망명한 것으로 나오고 있어 문제가 된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북상투와 오랑캐 옷을 통해서 위만이 조선인이었다는 견해에 대한 설득력 있는 비판은 김한규에 의하여 제기되었다. 그는 異民族에 의한 지배는 征服이 아니면 妥協에 의한 방법을 취하게 되는데, 위만이 거느린 中國亡命集團으로는 征服王家를 세울 수가 없었다고 하였다. 따라서 ‘燕人’ 위만이 북상투와 오랑캐 옷을 입었다는 記事가 곧 그가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證左하기 보다는 오히려 토착민과의 이질적인 성격을 보여주고, 나아가서는 그들에 의해 성립된 새로운 조선의 타협적인 국가성격을 시사해주는 자료라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견해를 뒷받침해주는 근거로 『史記』「酈生陸賈列傳」에서 중국인 尉佗가 南越에 들어가서 스스로 ‘儀禮’를 버리고 토착의 풍속에 同化됨으로써, 異民族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는 중국적 지배의 한 양식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들고 있다. 筆者는『史記』「朝鮮列傳」에서, 위만이 망명할 때 북상투와 오랑캐 옷을 입었다는 기록이 위만이 고조선 유민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해명해줄 설득력 있는 史料가 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우선, 이병도의 견해를 살펴보면, 그가 제시한 견해가 설득력을 가지려면 북상투나 오랑캐 옷이 고대에 조선인들만의 특성이어야만 한다. 陸生이 도착하자 尉他는 방망이 모양의 상투를 틀고 두 다리를 벌리고 앉은 채 陸生을 맞이하였다. 위의 기사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북상투는 고대의 조선인들만의 머리모양이었다고 보기 어려우며, 당시에는 南越 뿐만 아니라 匈奴 ․ 西南夷諸族에게도 공통된 것이었다. 그리고 秦始皇陵에서 출토된 陶俑도 일부는 북상투를 하고 있었는데 이는 북상투가 조선인만의 것이 아니라는 견해에 더욱 힘을 실어주고 있다. 또한 오랑캐 옷과 관련하여서는, 『魏略』의 기록에는 위만이 胡服을 하고 망명한 것으로 나오고 있다는 이종욱의 견해를 且置하더라도 위만이 입었다는 오랑캐 옷이 반드시 조선인계열의 후손으로 단정할 수 있는 근거로 충분치 않다. 반면에 筆者는 위만이 북상투와 오랑캐 옷을 입고 망명한 사료에 대한 김한규의 견해가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西漢 당시에 燕國지역은 古朝鮮지역과 접경을 하고 있었으므로 상당한 숫자의 朝鮮系列人들이 그곳에 居住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위만은 그곳에 거주하고 있던 조선계열인들을 통해서 조선인의 習俗은 물론 고조선지역에 대한 정보도 상당히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 가능하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위만이 북상투와 오랑캐 옷을 입고 망명했다는 기록이 그가 漢系人인지 朝鮮系人인지 드러내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김한규의 견해처럼 토착민과의 이질적인 성격을 보여주고 고조선의 타협적인 국가성격을 示唆하는 자료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Ⅴ. “古燕人”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 대한 검토

서영수는 위만의 출자와 관련하여, “朝鮮王滿者, 古燕人也”를 ‘위만은 옛 燕나라 사람이다’라고 해석하고 나서 다음과 같은 견해를 제기한다. “燕은 戰國時代 燕과 漢侯國 燕으로 구분되며, 한후국 연은 위만이 冊封을 받은 시기는 물론 사마천 당시까지 존재하고 있었다. 만일 한후국의 燕이었다면 『史記』에 굳이 ‘옛 연나라 사람’이라고 표현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위만이 漢代의 燕人이 아니라 戰國時代 燕人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서영수는 이로써 위만이 漢 初에 고조선으로 망명할 때, “북상투를 틀고 오랑캐 옷을 입었다”라는 記事의 의미가 분명해진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위만은 단순한 중국계 亡命人이 아니라 연의 朝鮮故地 점령에 의해 연인이 된 토착세력의 후손, 즉 고조선의 유민일 蓋然性이 보다 높아진다는 점과 사마천이 위만의 출자를 설명하면서 漢代부터 記述하지 않고 燕秦의 동진과정부터 기록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筆者는 서영수의 견해가 그다지 설득력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위만의 國家的 所屬을 밝힌 사료들 중에서『史記』에서 「古燕人」이라고 하였던 반면에,『漢書』․『後漢書』․『魏志』「濊條」․『魏略』등에서는「燕人」,『魏志』「韓條」에서는「燕亡人」이라고 하였다. 『史記』이외의 사료들에는 위만이 전국시대 연인임을 추정적으로나마 주장할 수 있는 ‘古’ 字가 不在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는데, 바로 이점은 그가 위만이 전국시대 연인일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들고 있는 論據의 허약성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또한 ‘古’ 字를 ‘옛’이라는 뜻으로 해석하지 않고, ‘원래’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서영수가 제기했던 모든 근거들이 무의미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그가 지적하고 있는 근거들이 주장을 뒷받침해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추측에 불과한 주장이 근거들을 지탱해주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古’ 字를 서영수가 해석한대로 ‘옛’ 뜻으로 받아들인다 해도 여전히 위만의 출자문제에 대해 설득력 있는 견해가 되지 못한다. 그는 “위만이 책봉을 받은 시기에 사마천이 존재했었는데 그가 굳이 옛 연인이라고 주장한 점은 위만이 전국시대 연인임을 드러내주는 사실이고, 이로써 위만은 고조선유민일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를 피력했는데, 이 같은 주장을 逆으로 생각해보면 오히려 위만이 漢代의 燕人일 가능성과 위만이 고조선유민이 아닐 가능성을 나타내주는 근거로도 看做될 수 있다. 사마천이 불과 1세기도 안 떨어진 시기의 사실을 기록하면서, 오랑캐라는 존재를 분명하게 認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燕國에 속해 있는 東夷族이건 中國系건 가리지 않고 燕人이라고 했다고 가정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의 주장대로, 위만이 전국시대 연인임을 인정한다고 해도 위만의 출자문제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주지 못한다. 주지하다시피, 전국시대 연나라가 요동까지 진출했었고, 그 지역에 番族이라든지 朝鮮濊貊系 사람들이 많이 섞여 살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옛 전국시대 연인’이라는 점을 가지고 위만이 고조선계 유민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는 것은 추측에 불과한 것이다.

 Ⅵ. 前代國號(=朝鮮) 繼承 및 原始部族長制 遺風(=相)에 관한 논쟁 검토

이병도는 위만이 왕이 된 후 朝鮮이라는 國號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만일 그가 중국인이었다면 단철음을 사용하였을 것이며 자존심으로도 前代의 國號를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중국인 移住民集團에 의하여 南越이라는 국호를 계속 사용한 예가 있기 때문에 이 같은 견해는 근거가 虛弱하다고 判斷된다. 朝鮮相 路人, 相韓 陰, 尼谿相 參, 將軍 王唊이 서로 모의하기를 (中略) 한음, 왕협, 노인은 모두 도망하여 漢나라에 항복했고, 노인은 도망하는 도중에 죽었다. (中略) 尼谿相 참은 이에 사람을 시켜 朝鮮王 右渠를 죽이고 와서 항복했다. 위의 기록에서 나타나는 ‘相職’에 대해, 이병도는 중국적 명칭을 빌린 朝鮮 고유의 官制인 ‘相’칭호를 사용하였던 것은 위만이 요동지방에 토착한 조선인 계통의 燕人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고 설명한다. 그 근거로 그가 중국계 燕人이었다면 중국식 관제를 사용하였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김한규는 ‘相職’이 조선 고유의 관제였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위만이 조선인이었음을 의미할 수 없다고 反駁한다. 그는 외래세력이 토착민에게 제시한 주요한 타협조건이 고유한 기존체제를 보존, 유지하는 것으로 위만조선에서도 고유한 기존체제의 핵심부분의 하나인 ‘相職’을 유지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筆者는 이병도의 견해대로 ‘相職’이 古朝鮮의 고유의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朝鮮相 路人과 尼谿相 參의 職銜 앞에 ‘朝鮮’이니 ‘尼谿’니 하는 고조선의 지명이 붙어있다는 것이 이와 같은 사실을 설명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筆者는 ‘相職’이 조선의 官制라는 것이 위만이 고조선계 유민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주는 史料라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는 김한규의 견해에 동의한다. 처음에 右渠를 쳐서 깨치기 전에 朝鮮相 歷谿卿이 諫하였으나 右渠(王)이 (그것을) 채용하지 않으므로 동쪽의 辰國으로 갔는데 그 때에 (그를) 따라 나선 사람이 2천여 戶나 되었다. 위의 記事에서나 앞에서 살펴본 『史記』「朝鮮列傳」에서 알 수 있듯이, 대체로 大臣을 뜻하는 말로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는 이들 ‘相’들은 상당한 규모의 자기세력을 보유한 듯 보인다. 이는 朝鮮相 歷谿卿이 右渠王과 不睦해서 辰國으로 망명할 때 따라 나선 사람이 2千餘 戶가 되었다는 것과 尼谿相 參이 사람을 시켜 右渠를 殺害했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다. 반면에 위만이 망명해 올 때 무리는 ‘千餘人’에 불과했다. 그리고 秦故空地에서 燕과 齊의 망명자들을 모았다고 하더라도 多大한 규모를 자랑하기는 어렵다. 더구나 위만이 망명해서부터 정권을 奪取할 때까지의 기간이 3~4년도 채 經過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위만이 조선의 국호와 고유한 기존체제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의 하나인 ‘相職’을 繼承했다는 것은 그가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보다는 그 집단에 同化됨으로써 지배권을 확립했다고 보는 것이 더욱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Ⅶ. 맺음말

 이상에서 위만의 출자에 관한 논쟁부분을 살펴보았다. 서론에서 염두에 둔 점을 바탕으로 위만의 출자와 관련해서 논쟁이 발생한 부분들을 考察해본 결과는 위만이 조선계 유민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위만이 조선계 유민이라는 근거들은 대게 韓國史의 범주 안에 국한되어서 설득력이 떨어졌다. 위만이 조선계 유민이라는 견해의 핵심적인 論據는 위만이 망명할 때 북상투와 오랑캐 옷을 입었다는 것이었는데, 이 또한 그 당시 고조선뿐만 아니라 주변나라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위만이 고조선계 燕人이 아니라고 해서 위만조선이 他民族에 의해 성립된 식민정권이라고 보는 것은 再考되어야 한다. 물론, 본고에서 살펴본 것처럼 위만이 국가를 건립한 후에도 ‘朝鮮’이라는 국호와 ‘相職’이라는 조선의 官制를 계승한 것이 그가 조선인임을 설득력 있게 설명해주진 못했지만, 반대로 이것들은 위만조선을 이끌어갔던 주도세력은 토착세력들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드러내 주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다시 말해, 이것들은 위만과 조선의 토착세력들이 妥協을 통한 共存關係로써 국가를 運用해 왔을 가능성을 더욱 높여주었다. 사실 한 국가를 주도하였던 왕실의 출자는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種族的 출자만으로 국가의 성격 내지 식민지 여부를 論斷하는 것은 단순한 논리라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앞으로 고조선의 국가 성격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새로운 각도의 검토가 요청된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1.사료

『사기』,『한서』,『후한서』,『잠부론』,『전국책』,『삼국지』

2.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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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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