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 오르거든 반드시 정상에 이르고 바다에 들어가면 반드시 바닥까지 내려가라”
“산에 오르거든 반드시 정상에 이르고 바다에 들어가면 반드시 바닥까지 내려가라”
  • 김철웅(동양학연구소)연구원
  • 승인 2010.03.11 23:06
  • 호수 1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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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오르거든 반드시 정상에 이르고 바다에 들어가면 반드시 바닥까지 내려가라”
김시습의 『십현담 요해(十玄談要解)』


작년 4월에 성철(1912~1993) 스님의 유품에서 『십현담 요해』를 한글로 번역한 언해본이 발견되었다고 하여 언론에 크게 보도된 적이 있다. 이 언해본의 원전은 바로 김시습(1435∼1493)의 『십현담 요해』 한문본이다.
김시습은 『금오신화』의 저자로, 그리고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난하며 절개를 지켰던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이름도 예사롭지 않다. ‘시습’은 『논어』 「학이」편 중에서 “배우고 때로 익히면(時習)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그는 이름처럼 어릴 때부터 학문에 남다른 자질을 보여준 천재였다. 김시습은 8개월 만에 글을 깨쳤고 세 살에 시를 지었으며, 다섯 살 때에는 이미 유교 경전인 『중용』, 『대학』에 통달하여 신동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이런 그에게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된 사건이 일어났다.


과거 준비를 위해 북한산 중흥사에서 공부하던 김시습은 수양대군(세조)이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임금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는 보던 책들을 모두 모아 불사른 뒤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전국 각지를 유랑하였다. 그의 나이 스물한 살 때였다. 금강산, 오대산을 비롯해 전국을 떠돌던 그는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서울로 올라와 10여 년을 살았다. 이때 수락산에서 머물면서 지은 책이 바로 『십현담 요해』였다.


『십현담 요해』는 제목 그대로 『십현담』에 김시습이 주해를 붙인 것이다. 『십현담』은 7자로 이루어진 10편의 불교 연작시로서 중국의 선승인 동안 상찰(?~961)이 불교의 참선 수행을 열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여기에다가 동안 상찰과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청량 문익(885~958)이 주석을 덧붙임으로서 널리 유포되기 시작하였다. 『십현담 주석』은 내용과 표현이 뛰어나 일반 대중이 읽어도 선불교를 잘 이해할 수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렇게 하여 『십현담 주석』은 선종 5파의 하나인 조동종에서 ‘선(禪)의 나침반’으로 불릴 정도로 중요한 문헌이 되었다. 이후 청량의 『십현담 주석』은 한국에 전해져 새로이 해석되었는데 이것이 김시습의 『십현담 요해』이다. 『십현담 요해』는 서문 말미에 “성종 6년(1475)에 폭천 산중에서 주해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어 김시습이 수락산 폭천정사에서 머물면서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십현담 요해』는 불교에 대한 김시습의 해박한 지식이 드러나 있다. 그는 『법화경』, 『열반경』 등의 경전을 인용하여 원문과 주해의 의미를 한결 풍요롭게 만들었다. 그리고 『십현담 요해』는 비유가 생동감 있고, 일상 생활에서 사례를 들어 선불교를 설명함으로써 일반 대중이 이해하기 쉽게 서술되어 있다. 김시습은 불법이 “일상의 사물에서나, 그리고 말하고 침묵할 때 드러난다”고 하여 일상성과 현실을 강조했다. 그리하여 “공(空)이라 말하자니 산은 높고 바다는 깊어 해는 떠오르고 달은 진다”고 풀이하여 현실 세계 그대로 산은 높고 바다는 깊으며 달은 지는 그 속에서 불교의 참 경지를 체험할 수 있다고 했다.


『십현담 요해』는 김시습의 처지와 경험이 묻어나 있다. “홀로 행하고 홀로 걸어 막힘이 없고 풍류가 없는 곳에서 스스로 풍류를 즐긴다”라고 풀이한 부분은 세조의 왕위 찬탈 이후 승려가 되어 전국을 떠돌던 그의 삶을 떠오르게 한다. 그리고 “보습을 끌고 쟁기를 당기며 일하니 다른 생각이 없다”고 한 것은 수락산에 은거하면서 직접 농사를 짓던 그의 생활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철저한 불교 공부를 강조하여 “산에 오르거든 반드시 정상에 이르고 바다에 들어가면 반드시 바닥까지 내려가라”고 역설하였다.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세상과 불화하면서도 철저한 공부로 유·불·도에 능통했던 그를 가장 잘 표현한 말이라고 할 것이다.


『십현담 요해』는 목판본으로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에 널리 유통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1548년에 언해본이 나왔고, 1925년에는 만해 한용운이 오세암에서 『십현담 요해』를 읽고 『십현담 주해』를 쓸 정도로 『십현담 요해』는 한국 불교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십현담 요해』 목판본으로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우리 대학 소장본을 비롯하여 연세대, 영광 불광사 등 총 5부에 지나지 않는다.

김철웅(동양학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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