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사이에서
다큐멘터리 사이에서
  • 이민호 기자
  • 승인 2010.03.16 18:43
  • 호수 126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선택도 거부도 할 수 없는 삶 복판에 선 그들은 신과 인간 사이에서 울고 있었다

무당의 또 다른 이름은 '샤먼'이다. 엄연히 말하면, 역사 속에서 우리의 뿌리인 단군왕검도 무당이었다. 그의 뒤를 이었던 고대의 왕들도 모두 샤먼이었다. 이렇듯 무당은 꽤 짙은 역사성이라는 옷을 걸치고 있다. 하지만 ‘과학’이 기지개를 켜면서부터 많은 사람들은 무당에게 눈을 흘기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무당은 애써 외면하고 싶은 존재이자, 미신(迷信)에 자양분을 공급하는 주범으로 전락했다. <사이에서>는 이처럼 우리 사회의 불편한 존재인 무당에 대한 진지한 다큐멘터리다. 유리벽 속을 바라보듯 무당의 삶을 슬며시 들여다보자. 그렇게 하면, 선택과 거부도 할 수 없는 삶 한복판에 선 그들이 신과 인간 사이에서 울고 있는 게 보일 것이다.

<사이에서>는 결코 원하지 않았던 삶, 그 한복판에 선 무당의 눈물과 슬픔에 주목한다. 우리와 같은 인간이기에, 가혹한 그들의 삶은 우리들의 가슴을 슬픔으로 출렁이게 한다. 죽은 이들과 살아남은 이들을 끊임없이 위로하지만, 정작 자신의 슬픔 따위는 함부로 드러낼 수 없는 숙명. "내 목숨과 남의 목숨을 버릴 수 있어야 바로 무당이다"라는 이해경의 말처럼 스스로 자신을 버리고 내던져야 하는 안타까운 삶을 살아가는 이들. 이제 위로의 몫은 그들이 아닌 우리에게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친다.

대무 이해경, 맑고 순수한 영혼이 든 황인희, 그리고 30년간 암을 비롯한 갖은 무병을 앓고 50살에 신내림을 받고나서야 고통에서 벗어난 손영희, 원인도 없이 왼쪽 눈을 실명하고 나서 신이 보인다는 8살 김동빈. <사이에서>에서는 네 사람의 손이 화면에 비춰진다. 평범한 사람들의 손이지만, 하나 같이 선택도 거부도 할 수 없는 때때옷을 입고 태어났다는 점에서 그들의 손은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입힌다. 게다가 어느 순간 그들이 엮어내는 이야기는 우리들을 슬픔의 나락으로 쑥 빠뜨린다. ‘신 반, 인간 반’인 그들은 어느 대목에는 작두에 올라타듯 신명나게 놀다가도, "무당 좋아서 하는 사람 하나도 없다. 팔자에 이미 너는 정해져 있어. 받아들여라. 그것이 네가 살길이다"라며 달래고 체념하며 때로는 원망의 절규를 부르짖는다.

열락과 고통, 애정과 증오, 이승과 저승 사이에서 방황하는 것은 비단 무당만이 아니다. 편견이라는 너울을 잠시라도 벗어보면, 그들과 우리들의 삶의 분할선이 점점 흐릿해지는 것을 경험할 터이다. 하긴 <사이에서>가 우리 마음속에 슬픔이 점점이 박혀있는 감동을 낳게 하는 것도 이 같은 이유 때문일지도. 수천 년 동안, 숙명의 무게에 짓눌린 상처를 닦아가며, 다른 인간의 한을 풀기위해 굿을 벌이고 있는 무당. 인간의 원초적 불안, 한 맺힌 영혼들이 죄다 과학이라는 필터에 오롯이 걸러지지 않는 한, 이들이 한바탕 벌여놓는 연회는 계속되지 않을까? 부디 그렇게 되기를.

이민호 기자 sksdlals@dankook.ac.kr

이민호 기자
이민호 기자 다른기사 보기

 sksdlals@dankook.ac.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