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의 대화] 제주도 올레길 걷기 여행
[세상과의 대화] 제주도 올레길 걷기 여행
  • 김상천 기자
  • 승인 2010.03.18 17:11
  • 호수 126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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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길이 좋아 한참을 놀멍쉬멍 거닐었다

책과 여행은 서로 닮았다. 이 두 가지는 비행기의 양옆에 있는 비상탈출구처럼 과열된 일상의 위급한 상황에서 안전하게 탈출시켜주고,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해준다. 지난 2월, 나는 그 양쪽 탈출구를 모두 이용했다. 우연히 접한 올레길에 관한 책은 내 가슴속에‘둥둥둥’진군의 북소리를 울렸다. 무식하고 용감한 나는 무작정 배낭을 꾸렸고, 그 흔한 트랙킹화도 없이 컨버스를 신고 제주로 날아갔다.

도착 다음날, 날이 밝자 마자 버스를 타고 1코스로 향했다. 1코스 도입부인 ‘알오름’ 정상에 올랐을 때, 나는 올레길 여행이 수박 겉핥기식 여행이 아님을 몸으로 느꼈다. 올레길 걷기 여행은 온 몸이 길속으로 들어가는 여행이다. 길을 따라 사람이 동물과 숲과 바다와 함께 걷는 여행이다.

길 곳곳에 걸려있는 주황과 파랑색 리본이나 바윗돌, 길바닥, 나무기둥 혹은 누군가의 담벼락에 그려진 재치 있는 화살표를 구불구불 따라가니 저절로 길 끝에 닿았다. 깨알같은 글씨의 지도를 펼칠 필요도, 자꾸 먹통이 되는 네비게이션을 리붓 할 필요도 없었다. 내가 한 일이라고는 그저 화살표를 따라가며 환상적인 제주도의 자연경관을 온 몸으로 즐기는 것뿐이었다. 오름 위에 올라 내려다보는 제주도의 전경, 해안길을 걸을 때 들려오는 파도소리, 숲 속을 거닐 때 마주치는 야생동물들은 고단한 심신을 부드럽게 다독여주었다. 자연과 마주했을 때 짊어진 배낭의 무게만이 민망하였다.

길에서 만난 사람들과는 자연스레 길동무가 되었다. 길 위에서 우리들은 금방 친해졌고 지나온 길과 가야할 길에 대해 이야기했다. 남한산성 꼭대기에서 한식당을 운영한다는 남자는 “생각하러 왔다가 생각하기를 잊어버렸다”고 말했다. 그는 벌써 30일째 올레길을 왔다 갔다 한다며 멋쩍게 웃었다. 부인은 “남편이 하도 집에 안와서 잡으러 쫓아 내려왔다”며 길을 걷는 동안 그에게 계속 핀잔을 주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 게스트하우스에서 다시 그 부부를 만났을 때, 남편은 자고 있었고 부인은 흑돼지와 감귤막걸리 파티를 즐기며 신나했다. 누가 누구를 잡으러 내려온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 올레길 8코스 중 대평포구의 해안가.


노닐며 걷다보니 어느덧 계획했던 열흘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나를 태우고 돌아갈 비행기는 내일 뜨기로 되어있었다. 비행기가 뜨기 여남은 시간 전, 나는 11코스 끝자락에 위치한 야생식물 군락지인 ‘곶자왈’을 걷고 싶어 이틀을 연기했다. 곶자왈의 숲에는 섬유질로 된 식물이라기보다는 갑각류의 껍질과 더욱 닮은 가시나무들의 발톱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죽어서 바싹 말라있는 나뭇가지가 넝쿨들에 의해서 공중에 떠 있고, 그 넝쿨들을 타고 더 작은 넝쿨들이 기어이 살아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곶자왈의 숲은 경쟁이 아닌 공존의 숲이다. 서로 얽히고 설키고, 부둥켜안고, 밟고 올라서는 동기는 악의 없는 순수한 생존욕구에서 출발한다. 곶자왈의 질서 앞에서 나는 숙연한 마음마저 들었다.

다음날 제주에서 뜬 비행기는 50분이 채 안되서 김포에 도로 앉았다. 어리둥절한 나는 달리는 버스 창밖을 보고 그제서야 잊고 지냈던 ‘동력’의 힘을 실감했다. 그러나 버스는 저 혼자서 달려간다. 풍경도 소리도 버스를 따라잡지는 못한다. 동력을 이용하면 목적지만 보이게 마련이다. 벌써 발로 흙을 밀고 걷던 길이 그리워진다.

 


김상천 수습기자 firestarter@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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