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슴을 닮은 소록도의 슬픈 역사를 찾아
사슴을 닮은 소록도의 슬픈 역사를 찾아
  • 이민호 기자
  • 승인 2010.03.23 17:43
  • 호수 127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육지를 잇는 다리는 완공되었지만 외지인 마음 속 다리는 아직 공사중이었다"

편집자 주

소록도는 전라남도 고흥반도 끝자락 녹동항에서 손에 잡힐 듯 보이는 작은 섬이다. 섬의 모양이 어린 사슴과 비슷하다고 하여 소록도(小鹿島)라 부른다. 면적은 110만 평으로 여의도의 약 1.5배. 620여 명의 한센인 외에 200여 명의 병원직원과 그 가족, 그리고 자원봉사자들을 합쳐 약 1000여 명이 산다. 2009년 3월 2일. 1916년 강제 격리 수용된 지 93년 만에 소록대교를 통해 육지와 연결됐다. 비로소 주민들에게 채워진 물리적 격리의 세월이 끝났다. <단대신문>은 수년 동안 물리적 격리의 세월이 소록도 주민에게 어떠한 애환을 남겼는지, 그리고 육지 길이 열린 지 1년이 지난 지금, 소록도 주민들에 대한 외부사람들의 인식에도 새로운 변화가 일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 소록도를 찾았다.

# 천형(天刑)의 섬이 지닌 애환의 역사

식민지 시대에는 대체로 1만 명이 넘는 한센병 환자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센병에 걸리면 눈썹이 빠지고 피부가 문드러지며 농즙이 흘렀다. 가까운 친구나 친척까지도 한센병 환자를 꺼리고 멀리했다. 그들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직업은 ‘구걸’이었다. 거리를 방황하며 구걸하는 이들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은 차가웠다. 혹시나 전염될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이었다. “해와 하늘 빛이/문둥이는 서러워/보리밭에 달이 뜨면/애기 하나 먹고/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서정주, ‘문둥이’, 1936년).” 시에서 띄엄띄엄 읽을 수 있듯, 심지어 당시 사람들은 문둥병, 즉 한센병을 하나의 생명을 기꺼이 바쳐야 나을 수 있는 하늘의 형벌로 생각했다. 아이들을 잡아먹는다는 소문은 그들의 접근을 막았다. 동네에 들어오려는 환자들은 주민들에게 집단적으로 구타당했다. 녹동에서 30여 년째 택시운전을 하고 있는 최태현(68)씨는 “가끔 섬에서 도망친 한센병 환자들이 나타나면 마을의 아이들은 울면서 이리저리 도망가곤 했다”고 말했다.

일제는 공중 위생이나 치안의 측면에서 한센병 환자들이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게다가 일제에게는 한센병은 문명의 걸림돌이자 국가의 치욕이었다. 결국 1916년 5월 조선총독부령 제7호에 의해 ‘소록도 자혜의원’이 설립됐다. 수용 인원이 제한되어 있었기에 각 도에 환자의 수가 배당됐다. 부양을 받을 길이 없어 거리를 배회하는 중증 환자들이 첫 번째 수용 대상이었다. 사슴을 닮은 소록도는 어느새 한센병 환자들의 집단 수용소가 됐다. ‘모던일본’ 조선판 1940년 8월호에 실린 ‘조선의 어느 작은 섬의 봄’이란 제목의 르포에서 소록도는 소박한 지상 낙원처럼 묘사됐다. “육지에서 쌀밥을 보기 어렵다고 할 때도 이 섬 정미소에서는 벼를 찧어 자급자족하니 백미를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실상은 판이하게 달랐다.

한센병에 대한 격리는 환자들에 대한 단종(斷種)으로 나아갔다. 소록도 자혜의원은 개원 이래 남녀별거제를 유지했다. 그러다가 설비확장으로 부부 환자의 수가 증가하자 1936년부터 부부의 동거를 허용했다. 다만 호적상 부부여야 한다는 등 일정한 조건을 갖춘 경우에 한정했다. 그러나 이 조건들을 갖추었다고 하여 곧장 동거가 허용되지는 않았다. 정관수술이라는 더 큰 조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단종은 차차 그 범위를 넓혀갔다. 도망가다 잡히거나 잘못으로 감금실에 갇힌 환자들도 단종 수술을 받았다. 일제시대 ‘이동’이란 이름의 한센인이 감금실에 끌려가 강제로 단종대(斷種臺)에 뉘어졌다. 그 단종대에서 말 그대로 씨를 끊는 수술을 받았다. 그는 이렇게 시 한편을 남겼다. “그 옛날 나의 사춘기에 꿈꾸던/사랑의 꿈은 깨어지고/여기 나의 25세 젊음을/파멸해가는 수술대 위에서/내 청춘을 통곡하며 누워있노라/장래 손자를 보겠다는 어머니의 모습/내 수술대 위에서 가물거린다/정관을 차단하는 차가운 메스가/내 국부에 닿을 때/모래알처럼 번성하라던/신의 섭리를 역행하는 메스를 보고/지하의 히포크라테스는/오늘도 통곡한다.” 김정행(70) 소록도주민자치회장은 “일제 때 한센인은 다섯 차례 ‘죽음’을 맞이했다”고 말했다. 가족과 생이별하여, 호적에서 파내져, 자녀를 낳지 못하도록 단종 수술을 받아, 그 시체를 해부해, 불에 태워 화장하며, 그리고  마지막으로 죽는다는 것이다.

중앙공원은 1936년에 착공돼 3년 4개월 만에 완공됐다. 황금편백나무, 삼나무, 팔손이나무, 치자나무 등으로 잘 조성되고 가꾸어진 이 중앙공원의 숲과 융단처럼 깔린 잔디에는 한센인들의 피, 땀, 분노, 눈물이 고스란히 배어있다. 한센인 6만 여명이 강제 동원돼 산림을 베어내고, 6000여 평의 대지를 조성했다. 암석은 완도 등에서 채취, 운반해 왔다. 나무는 일본과 타이완에서 들여왔다. 1942년 소록도에 강제격리 됐다는 장기진(87) 할아버지는 “몇 척의 배를 연결해 뭍에서 섬까지 다리를 만들었어. 우리는 목도라는 장대에 길이 2~3m, 폭 1~1.5m짜리 돌 수십 개를 매달아 옮겼지. 언덕 위를 오르다 쓰러지면 돌 위에 앉은 일본인이 몽둥이로 마구 때렸어”라고 회상했다.

소록도 자혜의원은 지속적으로 확대됐다. 그러나 확장 공사가 순조롭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환자들이 벽돌제조, 자재 하역, 골재 운반, 도로 개설, 도배 등을 담당했다. 자신의 보금자리를 만드는 환자들은 열의에 차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달라졌다. 그들은 강제로 이루어지는 노동에 지쳐갔다. 나중에는 분노했다. 1942년 원장이 수용 환자에 의해 살해됐다. 환자에 대한 대우가 가혹하다는 이유였다. 살해자는 “너는 환자에게 너무 무리한 짓을 했으니 이 칼을 받아라”라고 외치며 원장을 찔렀다. 그는 수용소의 부정을 폭로하여 환자에 대한 처우 개선을 도모할 계획도 있었음을 밝혔다. 소록도의 확장이 곧 환자의 복리 향상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1992년 아직까지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40대 남성은 1991년 발생한 ‘개구리소년실종사건’의 범인이 소록도 주민이라고 제보했다. 소록도 주민들이 한센병에서 나을 수 있다는 믿음에 이 소년들을 죽여 생매장 했다는 것이다. 모 유명신문사는 이 제보를 기사로 실었다. 이 기사는 온 국민에게 크나큰 충격을 안겨줬다. 심지어 소록도 주민들이 인육을 먹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후에 허위제보였다고 밝혀졌지만, 수사당시 경찰의 태도와 이 시간 뒤 소록도 주민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 등 소록도 주민들의 가슴엔 지울 수 없는 아픔이 남았다. 김 소록도주민자치회장은 “그때 당시 얼토당토 않는 주장이 마치 사실처럼 받아들여져서 참으로 원통했다. 2002년 개구리소년사건의 진상이 밝혀져 누명을 완전히 벗고 나서야 대다수 주민들이 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고 전했다.

# 비한센인들의 천국

 

소록대교 개통 이후 소록도는 몰려드는 관광객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소록도 주민들은 외부와 접촉할 기회가 많아졌지만 달갑지만은 않다. 일상생활을 방해받는 일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소록도 주민 신용만(71)씨는 “낮잠을 자고 있는데 불쑥 문을 열고 신기한 듯 쳐다보고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가버리는 사람도 있었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소록도를 찾는 많은 관광객들은 소록도가 관광지가 아닌 한센인의 치료와 재활공간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경우도 많다. 김 소록도주민자치회장은 “어떤 관광객은 ‘문둥이들 어디 있느냐’라고 해 반감을 산 적도 있다”고 전했다. 이런 이유로 주민자치회는 지난해 4월부터 마을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또 소록도를 몸소 찾는 관광객들도 한센병에 대한 편견과 오해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한센병이 여전히 전염성을 지니고 있는 병이라고 보고 있는 경우가 흔하다. 수원에서 온 관광객 정승호(44)씨는 “아들과 같이 오려고 했으나 혹시 전염이 될까봐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다리가 생기고 나서 소록도 주민들이 바다를 사이에 둔 녹동에 가는 경우가 잦아졌다. 그러나 아직도 녹동의 음식점 중에는 한센인 손님을 받지 않는 곳이 더러 있다. 심지어 배고프니 내 돈 내고 식당에서 밥을 사먹겠다고 해도 재수 없다며 문 앞에서 쫓아내는 경우도 있다. 녹동에 있는 음식점들은 대개 소록도를 보러 오는 관광객들을 상대로 영업을 하고 돈을 벌면서도, 한센인들에게는 그리 관대해 보이지 않는다. 녹동에서 순대국밥을 30년간 운영하고 있는 윤순자(64)씨는 “한센인들을 받는다는 소문이 나면 관광객들이 그 식당을 찾지 않기 때문에 웬만하면 돌려 보낸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예전에 비하면 많이 좋아진 것이 이 정도라고 하니 예전에는 어땠을지 짐작이 갈 뿐이다.

# 철창 없는 감옥 생활

소록도는 육지와 연결되어 비로소 물리적 격리의 세월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리고 다리 개통 이후 육지로 나가는 소록도 주민들과 소록도를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났다. 그럼에도 여전히 소록도는 사람들 마음속에 단절된 섬 또는 여전히 천형(天刑)의 섬으로 남아있다. 이로 인해 소록도 주민들은 철창 없는 감옥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 한센병은 인간이 아닌 하늘이 내린 형벌이고, 한센병 때문에 소록도에 강제격리 수용된 것 자체가 하늘이 내린 또 하나의 형벌이라고 믿어야 우리들은 안심할 수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들의 일그러진 얼굴, 어떤 경로로 전염되는지 모른다는 병균, 우리 아이의 간을 빼어 먹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그들의 범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까. 이것마저 아니라면 우리가 그들에게 가지는 편견 때문일까. 이것들 중에서 가장 먼저 버려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우리들이 더욱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참에 한센인들에 대한 우리 생각의 편견을 부수고 나서 소록도와 마음을 잇는 다리 하나 번듯하게 세워보는 건 어떨까?

이민호 기자 sksdlals@dankook.ac.kr

이민호 기자
이민호 기자 다른기사 보기

 sksdlals@dankook.ac.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