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정운경의 『탐라문견록(耽羅聞見錄)』
③ 정운경의 『탐라문견록(耽羅聞見錄)』
  • 김철웅 (동양학연구소) 연구원
  • 승인 2010.03.23 23:47
  • 호수 1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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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을 낳으면 기뻐하나, 아들을 낳으면 내 아이가 아니라 고래의 밥이라고 한다

▲하멜 일행의 제주도 난파 장면 삽화.

▲1872년에 제작된 제주도 지도. 하단에 동남아시아도 표시하였다.

1653년 8월 15일, 하멜은 이 날을 이렇게 기억하였다. “바람이 너무 심해서 서로의 말조차 들리지 않았다. 배에는 물이 넘쳐 났다. 우리는 닻을 내렸다. 그러나 파도와 강한 바람으로 닻을 고정시킬 수가 없었다. 그 순간, 배가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사람들은 파도 때문에 이리저리 휩쓸려 갔다” 하멜은 제주도 표착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긴박하게 묘사하였다. 일행 64명 중 36명이 살아서 제주 땅을 밟았다.

오래 전에는 ‘탐라’로 불렸던 제주도는 돌, 바람, 여자가 많다고 하여 ‘삼다도(三多島)’라고도 한다. 섬이라는 자연 환경 탓에 돌과 바람이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여자가 많다’는 것은 제주도 사람으로서 겪어야 했던 고달프고 슬픈 삶을 대변해준다. 바다가 삶의 터전인 제주 남자들은 언제나 하멜과 같은 처지에 빠질 수 있었다. 최부의 『표해록』에 의하면 제주 사람들은 “딸을 낳으면 기뻐하며 내게 효도하겠지 하고, 아들을 낳으면 내 아이가 아니라 고래의 밥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1731년 9월, 정운경(1699~1753)은 제주목사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제주도로 갔다. 특별히 할 일이 없었던 정운경은 틈틈이 제주도 곳곳을 여행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중 그는 일본, 대만, 유구(오키나와), 심지어는 멀리 안남(베트남)까지 표류했다가 돌아온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이들이 전해주는 이야기는 참으로 신기하고 흥미진진했다. 정운경은 이들 14명의 이야기를 『탐라문견록』에 기록하였다.

『탐라문견록』은 안남까지 표류했다 돌아온 고상영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리고 책의 내용 중 일본으로 표류한 경우가 9건으로 가장 많다. 이는 한반도와 일본 사이의 바람, 그리고 조류 때문이었다. 일본의 연구에 따르면 18세기 동안 조선인의 표류 사례는 409건에, 표류인이 수천 명에 달한다고 한다. 표류한 제주민들은 흥미로운 일들을 많이 경험하였다. 안남에서 코끼리를 본 고상영은, “몸둥이는 집채만 하고, 코는 사람이 손을 쓰듯 한다”고 했다. 대만에 표류한 윤도성은 사탕수수를 보고서, “줄기와 잎의 맛은 사탕과 같다. 줄기가 흰 것은 설탕과 사탕이 되고, 붉은 것은 흑설탕이 된다”고 했다. 일본에 표류한 이기득은 공연장의 모습을 보고, “나무 인형이 혼자 움직이며 부채를 흔들고 칼을 휘둘렀다.

 작은 원숭이를 길들여 무릎을 꿇고 절을 하게 했다”고 한다. 역시 일본에 표류했던 김시위는 일본과 무역하던 네덜란드인들을 보게 되었다. 그는 “눈이 깊고 코가 높았다. 팔 다리와 몸은 매우 길고 컸다. 손가락이 정강이만 했다”며 놀라워 했다. 일본으로 표류한 우빈 일행은 조선인 후손들을 만나기도 했다. 우빈 일행을 상대한 통역관은 자신의 조상이 조선에서 일본으로 끌려와서 살게 된 사연을 말해주었다. “내 할아버지는 본래 경상도에 살았었는데, 임진년 난리 때 포로로 왔다”는 것이다. 유구(오키나와)에 표류한 김일남은 지금까지 맛보지 못한 채소를 접했다. 그는 “덩굴로 자라는 채소가 있는데, 한번 덩굴이 지면 무성하게 몇 이랑씩 뻗어나간다. 맛은 달고 물러서 사람이 먹기에 좋다. 반드시 껍질을 벗겨 쪄서 먹으며 끼니를 대신한다. 덩굴 하나에는 몇 백 뿌리를 거둘 수 있어서 사람들이 굶주리지 않는다”고 했다.

김일남이 맛본 채소는 다름 아닌 고구마였다. 아직 조선에 고구마가 들어오기 전이었다. 『탐라문견록』은 제주민의 삶, 그리고 뜻하지 않은 표류로 인해 겪었던 이국(異國)에 대한 소중한 정보를 제공해준다. 이 때문에 이익, 박지원, 이규경 등을 비롯한 많은 지식인들이 『탐라문견록』을 애독했다. 그리고 18세기에 여러 책을 묶은 총서(叢書)를 발간할 때 『탐라견문록』은 항상 그 목록에 포함되었다. 연암 박지원이 『삼한총서』에 넣기 위해 옮겨 적은 필사본이 우리 대학과 서강대에 소장되어 있다.

김철웅(동양학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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