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단(正壇)의 32인
사판(祠版)에는 ‘충신지신(忠臣之神)’이라 쓰고, 제사에는 축문이 있다. 제품(祭品)은 밥 한 사발, 소탕(素湯) 한 대접, 나물과 과일 각 한 소반, 술 한 잔이다. 제관(祭官)은 인근의 찰방이나 수령이 담당한다.
증 공조참판 영월군 호장 엄흥도
영월 사람으로 군의 호장(戶長)이 되었다. 천순 정축년(1457) 10월 24일에 단종이 영월에서 승하하시자 흥도는 혼자 곡을 했고, 다음날 모친 장례를 위해 준비해 둔 옻칠한 관(棺)을 가지고 관아에서 북쪽으로 5리 정도 떨어진 동을지(冬乙旨)로 가서 즉시 매장하였다. 가족들이 화를 입을까 두려워 힘써 말렸지만 흥도는 ‘좋은 일을 할 뿐이라’고 하였다. 매장을 하고 나서는 도망쳤다.
현종 기유년(1669)에 그 후손을 등용하라 명령하였고, 숙종 무인년(1698)에 공조좌랑으로 추증하였다. 영조 병오년(1726)에 그의 옛 집에 정려문(旌閭門)을 세우고, 계해년(1743)에 공조참의에 추가로 추증하고 관리를 보내 제사를 지내게 했으며, 무인년(1758)에 공조참판에 추가로 추증하고 창절사(彰節祠)에 배향하였다. 나(정조)는 을사년(1785)에 지방관에게 명령하여 그의 분묘를 증축하게 했고, 무신년(1788)에 다시 제문을 지어 보내 제사를 지내게 했다.
위의 글은 정단에 모신 32인 가운데 한 사람인 엄홍도(嚴興道)의 행적과 사후 대우에 관한 기록이다. 정단에 모신 32인은 ‘충신지신(忠臣之神)’이라 기록된 신위에 공동으로 이름을 쓰고, 왕실에서 보내준 제문을 가지고 수령이나 찰방이 제사를 지낸다. 제사 음식도 정했는데, 밥과 국, 나물, 과일이 놓인 간소한 제상에 한 잔의 술을 올리는 방식이었다.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었을 때 엄흥도는 호장(戶長)이었다. 호장은 지방관을 보좌하는 향리의 우두머리로 현지에 오랫동안 거주한 토착 세력이라 할 수 있다. 엄흥도는 단종이 17세의 나이로 죽임을 당하던 날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곡을 하였고, 이튿날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여 모친의 장례를 위해 준비해 두었던 관에 모시고 자신의 선산인 동을지산으로 가서 매장했다.
그러나 엄흥도의 행동은 당시로서는 매우 위험했다. 단종은 금성대군이 주도한 복위 사건에 연루되어 죄인의 몸으로 사망한 것이므로, 엄흥도는 국가의 죄인을 도운 셈이기 때문이다. 처벌을 걱정한 가족들이 당연히 이를 말렸지만 엄흥도는 ‘좋은 일을 하다가 화를 당하면 달게 받겠다’며 듣지 않았다. 단종의 장례가 끝나자 엄흥도는 가족들과 함께 영월을 떠났는데, 이후에 있을 처벌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엄흥도의 행적은 이백년이 지나서야 재평가를 받았다. 그의 벼슬이 공조참판으로 올라갔고, 후손은 관리로 등용되었다. 그의 집 앞에는 정려문이 세워지고, 사육신을 모신 창절사에 추가로 배향되었다. 정조는 영월부사에게 그의 묘소를 증축하게 하고, 제문을 지어 보내며 제사를 지내게 했다. 정조는 장릉의 배식단에도 그의 이름을 포함시켰는데, 단종 때문에 죽임을 당하지 않았던 인물로는 그가 유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