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대학생 김태준’
‘진짜 대학생 김태준’
  • 김지영(국어국문·4)
  • 승인 2010.03.31 17:38
  • 호수 127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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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준(金台俊, 1905~1949.11)국문학자. 호 천태산인(天台山人). 평북 운산(雲山) 출생. 1928년 경성제국대학 예과를 졸업한 후 1931년 같은 대학 법문학부 중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대학 시절 《신흥(新興)》지에 참여하였으며, 1930년 국내 최초의 비교문학적 국문학 연구인 《조선소설사》를 《조선일보》에 연재함으로써 두각을 나타냈다. 1931년에는 이희승(李熙昇) ·조윤제(趙潤濟) 등과 조선어문학회(朝鮮語文學會)를 결성하였으며, 그해 단행본인 《조선한문학사》를 발간, 한문학과 국문학을 접목시킴으로써 한국문학사를 정립시켰다. -두산백과사전-

김태준 이후로 국문학연구가 70년 넘게 더 진행된 현재에서도 그의 연구를 뒤집을 만한 이렇다 할 연구결과가 아직 등장하지 못 할 만큼 대단한 김태준의 국문학사 전대미문의 업적이, 모두 그가 경성제국대학 학부 재학시절에 이룬 것임을 알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던 기억이 난다. 학부생이 그러한 업적을 쌓을 만큼 학업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을 수 있음에도 놀라웠고 그러한 결실을 대학원도 아닌 대학 학부에서도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 믿을 수 없었다.

사실 필자는 그 당시, 대학 입학부터 학업에 대한 열정은 커녕 전공에 대한 흥미조차도 없어, 매년 1학기만 등록하고 2학기는 어김없이 휴학해버리는 생활을 2년이나 반복하다가 부모님 눈치에 간신히 2학년 2학기를 등록한 상태였기에 더욱 와 닿았던 것 같다. 하지만 얼마 전 ‘고대녀 김예슬 사건’을 통해 바라본 김태준의 열정적 상아탑에 대한 2010년 식 해석은 해결되지 않을 딜레마 일뿐이고, 이루어지지 않을 이상(理想)일 뿐이다. 2010년 대학에서의 열정의 결과는 무엇인가, 상아탑을 꿈꾸던 열정들의 장래는 과연 어디로 흘러가야 하는가. 자신의 전공분야에서 아무리 열정적으로 자신만의 상아탑을 쌓아간다고 한들 사람들이 묻는 것은 “그래서 지금 너는 어디에 있느냐? 어디서 일하느냐?”일 뿐이다. 모든 열정에 대한 대한민국의 질문의 수준은 이것을 넘어가지 못한다. 때문에 아주 뛰어난 집념과 열정으로 뭉쳐 대학원을 진학하고 박사학위를 받아 학자로서의 꿈을 이어나간다고 한들, 대한민국 현재의 현실에선 결국 대학교수라는 한 직업분류에 대한 취업 관문으로 여겨질 뿐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대학이 어째서 지식의 상아탑이 아닌 취업의 아카데미로 흘러가느냐는 비판은 대학과 그 곳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 그리고 학생 입장에서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다. 대학은 사회적 현실을 지식인재 양성에 반영하는 게 당연하다. 우리가 지금 문제시 하고 있는 대학의 현실은 대학만의 책임이 분명 아닐 것이다. 그러나 누구의 책임을 따질 수 있는 문제 역시 아니라는 것도 분명하다. ‘지식의 상아탑’이라는 수식어조차 낯설어 질만한 현실은 일명 ‘고대녀 김예슬 사건’을 접하고 남의 일인냥 안타깝다는 혀를 내찬 사람들 모두와 그 사람들이 쌓아온 역사에서 빚어진 사회적 책임인 것이다. 김태준은 1947년 공산당 활동으로 처형당하기 직전까지도 자신의 정치적 사상이념 보다도 지식의 상아탑에 남고 싶다는 인터뷰를 남겼다는 것을 읽었던 것이 기억난다.

그가 살았던 세상은 일제의 암울한 지배기였으며, 동족의 사상간 대립으로 현대 사회보다 더욱 복잡하고 암울한 분위기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한 지식인이 남고자 꿈꾸던 곳은 평화로운 유토피아도 아니고 지식의 상아탑이었다. 그가 재학했던 경성제국대학이 일제 강점기 조선 우민화 정책의 한 단면이었고 세상은 나라도 없이 어지러웠다한들, 적어도 그는 취업아카데미가 아닌, 진정한 지식의 상아탑에서 ‘진짜 대학생’으로 살았던 것이다.

김지영(국어국문·4) 양

김지영(국어국문·4)
김지영(국어국문·4)

 dkdd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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