⑤ 박은식의 『안중근전(安重根傳)』
⑤ 박은식의 『안중근전(安重根傳)』
  • 김철웅 연구원
  • 승인 2010.04.07 21:33
  • 호수 1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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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를 죽인 것은 세계 평화를 희망하고 평화의 공적을 제거한 것이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중국 하얼빈역에서 한 한국인이 중절모를 쓴 일본인을 향해 6발의 총탄을 발사했다. 이 한국인은 “대한(大韓) 만세”를 외치고 현장에서 체포되었으며, 총탄을 맞은 일본인은 10분 후에 사망하였다. 이 사건은 당사국인 한국과 일본은 물론 중국인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다. 중국인 나남산은,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하였으니 한국인의 기개가 죽지 아니하였고, 우리 중국인도 감격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만일 안중근의 일격이 없었더라면 일본이 동아시아 전체를 이미 장악했을 것이라고 했다. 증용은 “안중근이 이토를 저격한 것은 조국을 위해 복수한 것만이 아니라 실로 세계를 위해 공적(公敵)을 제거한 것”이라고 하였다.

▲ 창해노방실(박은식)의 저술임을 표기한 『안중근전』의 첫 장.

 안중근 의사(義士)가 ‘동양 평화의 공적’인 이토 히로부미를 제거한 이 일은 독립운동을 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이에 안 의사의 행적을 널리 알리려는 일들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독립운동가로서 임시정부 대통령을 역임한 박은식(1859~1925)은 안중근의 일대기를 완성하여 그의 업적을 역사에 남기고자 했다. 1911년,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망명한 박은식은 상인, 농부, 학생 등 이곳 사람들 모두가 안중근을 이야기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이에 박은식은 안중근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여 그의 전기를 완성하였다.

▲ 삼의사 묘소 옆에 임시로 조성된 안중근 의사의 묘.

 박은식의 안중근 전기는 1911년에 완성된 이듬해에 『동서양위인총서』의 일부로 출간되었다. 이 책은 다시 1914년경 『안중근』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이후 임시정부가 상해에서 발행하던 『독립신문』은 그 내용을 번역하여 실었다. 1920년 6월 10일자(제83호)부터 6월 24일자(86호)까지 총 4번에 걸쳐 연재하였는데, 『독립신문』은 게재 서두에서, “이것은 박은식 선생의 저술로 중국에서 여러 해 전에 발간된 것”이며, “우리 민족과 대한국을 위하여 정의의 총탄으로 세계를 놀라게 한 안중근의 약력”이라고 소개했다. 우리 대학에는 박은식의 한문 원전을 윤석천이 한글 토를 달아 펴낸 『안중근전(安重根傳)』이 소장되어 있다.


 『안중근전』은 총28부로 하여 안중근의 출생과 독립운동, 거사와 재판 과정을 소상히 서술했다. 즉 안중근은 출생 당시 가슴에 북두칠성과 같은 모양이 있어 조부가 이름을 응칠(應七)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는 역사에 능통하고 서예에 뛰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활 쏘기와 말 타기를 좋아해 날아가는 새를 화살로 쏘아 떨어뜨렸다는 일화를 소개하였다. 20세부터 그는 뜻있는 젊은이들을 모아 무기를 자비로 구입하여 군사 훈련을 하였으며, 1906년에는 삼흥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운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1907년에 고종이 강제 퇴위 당하자 러시아의 연해주로 가서 30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였다. 이범윤을 총독으로 추대하고 참모중장이 된 안중근은 1908년 6월에 함경북도 경흥군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비대를 격파했다. 1909년 3월 2일에는 함께 의병활동을 하던 12명이 모여 단지회(斷指會:일명 단지동맹)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그러던 중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 시찰을 명목으로 하얼빈으로 온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10월 26일 오전 9시 반경, 안 의사는 하얼빈역에서 이토를 저격하였다. 박은식은 안 의사의 거사를, “이토는 세계 평화의 공적이며, 그 괴수를 제거”한 일이라고 평가했다. 거사 이듬해 2월 7일에 시작된 재판은 7일 만에 사형을 선고하였고 3월 26일에 사형을 집행했다. 일본은 안 의사의 시신을 가족에게 인계하지 않고 아무도 모르게 매장해 버렸다. 그리하여 “조국 광복의 그날 고국에 묻으라”는 그의 유언은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지켜지지 않고 있다. 효창공원 삼의사(三義士) 묘역에 있는 시신 없는 안 의사의 묘가 그의 유언이 이루어지길 기다리고 있다.              

 

김철웅(동양학연구소 연구원)

김철웅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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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kdd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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