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내 (살) 구멍없는 구멍가게들
서울시내 (살) 구멍없는 구멍가게들
  • 이민호 기자
  • 승인 2010.05.04 18:14
  • 호수 12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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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행복했던 곳, 우리동네 구멍가게

서울시내 (살)구멍없는 구멍가게들 199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서울 시내 중심가를 중심으로 대형마트가 속속 들어서기 시작했고, 2000년대에 와서는 심지어 주택가 깊숙한 곳까지 ‘SSM’이라고 불리는 기업형 슈퍼마켓이 침투하기에 이르렀다. 이로 인해 주변지리, 동네 경조사, 이웃의 숟가락까지 꿰고 동네의 허브 역할을 했던 구멍가게들은 점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단대신문은 현재 서울시내 구멍가게들이 처해 있는 현실과 그 원인을 살펴보기 위해 직접 이곳들을 찾았다. <편집자주>

재개발 날짜만 학수고대

  한남동 언덕배기에 자리하고 있는 구멍가게. 가게 언저리에 쌓여있는 빈병들과 담배라고 적혀 있는 귀퉁이 문구만이 이곳이 작은 가게라는 것을 짐작케 했다. 문의 묵은 때와 색 바랜 스티커들은 세월의 흔적을 민낯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안에는 언제 들여다 놓았는지 알 수도 없는 켜켜이 먼지 쌓인 물건들만 띄엄띄엄 진열대를 차지하고 있었다. 5평 남짓한 공간과 진열된 상품의 남루함이 서로 깍지끼며 미묘한 상황을 연출했다. 이곳을 20여년 가까이 지키고 있는 주인 김 할아버지는 “손님이 워낙 없어 물건을 많이 가져다 놓을 수도 없다”며 “한때는 나름대로 입에 풀칠은 하면서 살았지만 이제는 재개발이 성사되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는 실정”이라며 회한에 잠겼다.

  요즘 장사가 잘 안되는 이유에 대해 묻자, 김 할아버지는 “대량으로 물건을 주문해 싸게 파는 이마트 같은 대형 할인마트에 사람들이 몰리면서, 주변사람들에게 ‘비싼 가게’로 불도장 찍혔다고 하소연하듯 말했다. 게다가 몇 년 사이 등장한 기업형 슈퍼마켓(SSM)은 골목까지 파고들어 24시간 내내 불을 밝히면서 지금과 같이 몰락의 기로에 서게 됐다고 강조했다.

  김 할아버지는 이어 한남동이 재개발 지구로 선정되고 나선 사실상 장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덧붙였다. 그에 의하면 한남동이 재개발 지구가 되면서 한국인 주민들이 대거 이곳을 떠났다고 한다. 대신에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중국인, 아랍인, 아프리카인들이었다. 이태원과의 접근이 용이하다는 점은 차치하더라도 이곳의 월세가격이 재개발로 인해 대폭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김 할아버지 가게의 설 곳을 더욱 잃게 했다. 그는 “아랍인, 아프리카인, 심지어는 최근에 중국인 전문상점이 속속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전혀 장사가 안 되고 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실제로 할아버지의 가게 주변엔 ‘중국인 전문 식품점’, ‘무슬림 전문 상점’ 등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각종 상점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었다.

 ■ 신수동 내비게이션

  서강대 후문에 위치한 광천상회는 간판부터가 남루하다. 퍽 흥미로운 점은 가게 문에 바짝 붙은 담배스티커와 교통카트충전스티커만은 하야말끔하다는 것이다. “요즘은 담배 찾는 손님들과 이곳이 버스정류장 근처라서 그런지 교통카드 충전하는 손님들 밖에 없다”는 최 할머니의 푸념이 그 이유를 미루어 짐작케 했다. 이천 원짜리 담배를 팔면 이백 원이 남고, 교통카드 만 원을 충전하면 칠십 원이 남는단다. 그는 “100원은 쓰더라도 10원은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지금까지 구멍가게를 계속해왔다”며 여태껏 가게 문을 열어온 속사정을 밝혔다.

  이곳에서 줄곧 24년 간 구멍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최 할머니는 “이제는 사라질 때가 왔다는 생각을 매년 하고 있다”며 “그래도 간혹 찾는 단골손님들과 옛 이야기를 나눌 때면 1년이라도 더 하고 싶은 생각이 연거푸 떠오른다”면서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아직 이곳 주변에 동종업종의 가게는 없지만 대학 후문에 공사 중인 건물이 완성되면 그곳에 할인마트도 들어올 예정이라고 한다. 이로 인해 담배판매소나 교통카드충전소 역할마저도 얼마나 할 수 있을지 장담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해 그는 “작금의 현실이 돌이킬 수 없는 사회적 흐름이라고 본다”며 “다만 정부가 이곳처럼 영세 서민들이 운영하는 소규모 점포들에 대한 대비책을 전혀 마련하지 않는 현실이 안타깝다”며 속마음을 밝혔다.

  최 할머니의 구멍가게는 돈 안 되는 역할도 톡톡히 수행하고 있었다. 가게를 찾은 손님이 주변지리에 대해 묻자 할머니는 가게 문을 열고 나와 손짓으로 내비게이션 마냥 길을 안내해 주었다. “외지인들에게 길을 안내해주는 일을 20년 넘게 해오다보니깐 이젠 이골이 났다”고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는 이어 “대형마트처럼 다양한 물건과 가격할인은 없지만 대신 이곳엔 사람 사는 인정미가 있다”고 힘줘 덧붙였다. 가게를 찾은 단골손님 김모 씨는 “구멍가게를 보면 어릴 적 부모님이 안 계실 때면 얼굴 도장으로 외상을 하던 시절이 떠오른다”며 “동네 구멍가게가 따뜻한 정의 상징인 만큼 힘들더라도 자리를 지켜줬으면 하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라고 전했다.

회현동 굴속 구멍가게

▲ 굴속 구멍가게 전경.
  회현역 4번 출구로 나와 남산산책로로 가볍게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일본군이 은신처로 사용하기 위해 파놓은 구멍에 들어선 구멍가게를 볼 수 있다. 그야말로 명물구멍가게다. 하기야 서울시내에 이런 가게가 있다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 흔한 간판도 심지어 담배스티커마저 붙어있지 않아 가까이서 보기 전엔 이곳이 작은 가게라는 사실조차 알아채기 쉽지 않다. 그래서인지 이곳의 주요 고객은 동네사람들이다.

  남대문시장서 고추 장사를 하다 9년 전부터 이곳을 운영하고 있다는 정 할머니는 “작년부터 구청에서 길을 확장하다는 명목 하에 이곳을 메우려고 하고 있다”며 답답한 심정을 털어 놓았다. 가게 주위를 둘러보니 도로확장공사가 상당한 정도 진행된 상태였다. 가게 위쪽에도 어떤 이유에선지 몰라도 다수의 구멍이 뚫려있었다. 아울러 그는 “도로를 확장하면 가게의 삼분지 일 가량 잘려나갈 테지만 나머지 공간만으로도 충분히 가게를 운영할 수 있다”며 “여태껏 아무런 탈이 없었음에도 단지 위험하다는 이유만으로 이곳을 막으려고 하는 구청의 행태는 잘못된 것”이라면서 가슴을 쳤다.

▲ 굴속 구멍가게 내부모습.
  정 할머니의 구멍가게는 여느 가게와 꽤 다르다. 내부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물건들 보단 한켠에 위치한 널따란 마루다. 이것이 가게 전체 공간의 사분지 일을 넘게 차지하고 있을 정도다. 이와 같은 모양새는 지금껏 이곳이 어떠한 기능을 해왔는지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웃 할머니는 “이곳은 가게 역할과 더불어 동네사랑방으로 기능해 오고 있다”며 “이곳이 사라지면 동네 노인들은 쉴 곳을 잃게 되는 셈”이라고 눈시울이 불거진 채로 말했다. 이 뿐만이 아니었다. 가게를 찾은 등산객은 이모 씨는 “남산으로 산책하러 올 때면 이곳에 들려 쉬어가곤 한다”면서 “정 할머니의 구멍가게는 정겨운 보금자리 같은 곳”이라고 말했다. 이윽고 그는 문화유적으로써도 충분한 가치가 있는 이곳을 개발논리를 내세워 무조건 파괴코자 하는 구청의 작태에 대해 질타했다.

■ 1+정(情) 판매소

  80년대 슈퍼마켓이 잇달아 등장하고 이어 편의점이 밤낮으로 불을 밝히면서부터 구멍가게들은 사실상 몰락의 기로에 서게 됐다. 90년대 중반 국내 유통시장이 전면개방 되면서 늘어난 대형 할인마트와 최근에 등장한 기업형 슈퍼마켓(SSM)은 골목까지 파고들며 마지막 남은 구멍가게들의 숨통을 죄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재개발 열풍까지 가세해 구멍가게가 살아갈 구멍을 더욱 좁게 만들고 있다. 이와 맞물려 동네 구멍가게서 외상으로 물건을 구입해 생활해왔던 돈도 없고, 이동의 수단도 없는 사람들의 생활도 한결 어려워지고 있다.

  그러나 동네 구멍가게에는 있지만 대형 슈퍼마켓에는 없는 것이 하나 있다. 인정미가 바로 그것이다. 이런 인정미가 구멍가게를 내비게이션과 사랑방 역할을 하게끔 했다고 볼 수 있다. 이 때문에라도 구멍가게는 섣불리 멸종되지 않을 것이다. 최근 일본에서는 노인인구가 늘어나고 독신자 세대가 급증하면서 인간미 넘치는 동네 구멍가게들이 다시 부각되고 있다고 한다(유쾌한 팝콘 경제학 中). 소소한 동네 얘기를 나누며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는 구멍가게의 경쟁력이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려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판매품목도 다양하고 각종 할인혜택이 풍부한 대형 할인마트에 많이 찾지만, 좀더 시간이 흘러 크고 좋은 새것에 물린 장삼이사들이 인간미 넘치는 구멍가게를 다시 찾게 될는지도 모를 일이다. 대형마트에 가면 ‘1+1’ 내걸고 소비자들을 유혹하는 상품들이 지천이다. 하지만 ‘1+정(情)’은 전연 판매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디 가서 사야할까?

이민호 기자 sksdlal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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