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양녕대군의 사당, 지덕사
(41)양녕대군의 사당, 지덕사
  • 김문식(사학) 교수
  • 승인 2010.05.11 13:33
  • 호수 127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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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를 사양하는 최고의 덕, 지덕(至德)-세종에게 왕위를 양보한 양녕대군


아, 무슨 덕(德)이 제일 높을까? 사양하는 덕이다. 무슨 사양이 가장 지극할까? 명예를 사양하는 것이다. 천승(千乘)은 큰 나라이고 단두(簞豆)는 작은 물건이지만, 명예를 위해서라면 때로는 크고 작은 것이 바뀔 수도 있다. 공자는 태백(泰伯)의 지극한 덕[至德]을 찬양하며 백성들이 무어라 부를 것이 없다고 하셨는데, 나라를 사양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명예를 사양하는 것은 불가능함을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 (중략)


양녕대군(讓寧大君)은 우리 태종대왕의 맏아들로 10세에 세자(世子)에 책봉되어 훌륭한 요속(僚屬)들의 도움을 받아 성취를 이루었고, 직접 천자(天子)를 만나자 천자께서 시를 내려 아름답게 여기셨다. 16, 7세가 되었을 때 세종(世宗)이 성덕(聖德)을 타고 나서 하늘과 사람들의 마음이 그리로 쏠린 것을 알고, 술에 빠지고 기생과 어울리며, 거짓으로 미친 척하기를 십년을 하루같이 했다. 그러자 대군은 폐위되었고, 세종은 드디어 세자 자리를 거쳐 왕위에 올랐으며, 예(禮)와 악(樂)을 정비하여 우리나라 억만년의 무궁한 기반을 다져 놓았다. 이는 태백이 계력(季歷)에게 양보하여 주나라 왕업을 이루었던 일과 비슷한 점이 있다. (중략) 그는 명예를 사양하기를 잘한 것이니, 태백 이후 수천 년이 지났지만 ‘지덕(至德)’이란 이름을 대군이 아니면 누가 받을 수 있겠는가?

 

양녕대군의 사당은 한성의 남쪽에 있는데 ‘지덕’이란 이름은 숙종께서 명령하신 것이다. 그렇지만 이름만 지어놓았을 뿐이고 편액을 새겨 걸지는 못했다. 나는 즉위 13년인 기유년(1789)에 그의 제사를 도와주고, 사당의 편액을 내렸으며, 이 사실을 기록하여 방미(榜楣)에 써두게 하였다.

▲지덕사는 서울시 동작구 상도동에 있는데, 양녕대군의 사당과 무덤이 같은 경역에 있다.

1789년(정조 13) 12월에 정조가 작성한 ‘지덕사의 기문(至德祠記)’이다. 지덕사는 태종의 맏아들인 양녕대군의 사당을 말하는데, 1675년(숙종 1)에 사당이 완성되자 숙종이 ‘지덕(至德)’이란 이름을 지어 하사했다. 지덕이란 이름은 논어(論語)에서 유래하는데, 공자가 천하를 세 번이나 사양한 태백(泰伯)의 행적을 칭찬하며 지덕이라 부른 것에서 유래한다. 주나라 태왕(太王)에게는 태백, 중옹(仲雍), 계력(季歷)이라는 세 아들이었는데, 태왕은 창(昌)이란 훌륭한 아들이 있는 계력에게 왕위를 물려줄 의사가 있었다. 태백은 이러한 부친의 뜻을 미리 알고 동생인 중옹과 함께 형만(荊蠻) 땅으로 달아났는데, 이 덕분에 훗날 창이 왕위에 올라 주나라의 번성기를 여는 문왕(文王)이 될 수 있었다.


정조는 덕 가운데 최고의 덕은 명예를 사양하는 것인데, 이런 점에서 양녕대군의 행적은 태백의 행적보다 나은 것으로 평가했다. 양녕대군은 국왕의 자질이란 점에서 동생인 충녕대군(세종)이 자신보다 나은 것을 알고 일부러 못된 짓을 하여 세자에서 쫓겨났고, 이 때문에 왕위에 오른 세종은 예악을 정비하여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는 공적을 남겼다. 정조는 이런 행적은 태백이 동생에게 왕위를 양보하여 주나라의 기틀을 마련한 문왕이 나오게 한 것과 비슷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태백은 외국으로 달아나 그곳의 풍습을 따랐던 행적이 기록으로 남았지만, 양녕대군은 외국으로 달아나지 않고 평생 동안 다섯 국왕을 섬기면서 무난하게 지냈기 때문에 가까운 사람조차 그의 깊은 심정을 잘 모르게 했다. 정조는 양녕대군의 이러한 행적은 태백도 쉽게 따라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 평가했다.


정조는 숙종 때에 이름은 지어졌지만 현판은 없었던 지덕사에 현판을 만들어 보냈고, 승지 홍명호를 파견하여 자신의 제문으로 제사를 지내게 했으며, 이러한 연유를 기록한 지덕사기를 지어 걸어놓게 하였다. 선왕인 숙종의 업적을 계승하는 조치들이었다. 이 때 정조는 효령대군의 사당인 청권사(淸權祠)에도 제사를 지내게 했는데,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은 세종에게 왕위를 양보한 형제로 조선의 태백과 중옹에 해당하는 인물이었다.


김문식(사학) 교수
김문식(사학) 교수

 dkdd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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