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 앞 작은 용산 '두리반'
홍대 앞 작은 용산 '두리반'
  • 이민호 기자
  • 승인 2010.05.19 21:38
  • 호수 126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화염병 대신 기타를 들고 농성을 축제처럼 즐기고 있는 연대의 장

▲ 두리반의 상호는 ‘여럿이 둘러앉아 먹을 수 있는, 크고 둥근 상’이라는 뜻이다. 이곳은 한때 다정한 사람들이 둘러앉아 맛난 음식을 먹으며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자, 한 가정의 경제를 지켜주던 삶터였다.
홍대 앞에 ‘작은 용산’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 2호선 홍대입구역 4번 출구 부근에 홀로 덩그러니 세워져 있는 두리반 칼국수집이 그곳이다. 이곳의 소식이 알려지자 이내 분노한 글쟁이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고, 가까운 이웃은 신기의 솜씨를 발휘하여 전기가 끊긴 두리반의 어둠을 밝혀주었다. 뿐만 아니라 기습 철거로부터 작은 용산 두리반을 지키자며 자립음악가들이 기타와 드럼을 들고 이곳을 찾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주인은 국수 한 그릇조차 손님들에게 내놓지 못하는데도 두리반은 늘 다양한 사람들로 북적인다. 단대신문은 재개발로 인해 두리반이 겪고 있는 애환과 이곳이 다양한 사람들이 연대하는 장소로 거듭나게 된 이유를 살펴보기 위해 농성 140일째 되는 날 직접 이곳을 찾았다. <편집자 주>

난쟁이 부부의 우물

안종려씨는 찜질방 구내식당 등을 하며 그동안 애면글면 모은 전 재산으로 2005년 3월 홍대입구역 어름에 두리반이라는 식당을 차렸다. 가난한 소설가인 남편 유채림씨만 바라보곤 ‘네 식구의 목마름을 해결할 수 없다 싶어 판 우물’이었다. 그런데 개업을 시작한 지 3년도 안 돼, 두리반이라는 우물을 빼앗으려는 자들이 불시에 나타났다. 유 씨는 “인천공항행 경전철역이 들어선다고 하여 졸지에 노다지가 된 동교동 167번지 일대를 투기꾼 집단이 사들이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두리반이 들어 있는 3층 건물도 예외는 아니었다.

종당엔 두리반이 세 들어 있던 건물은 남전DNC라는 회사에 넘어갔고, 이내 한국토지신탁으로 다시 옮겨갔다. 2008년 2월에는 가게를 비우라는 명도소송장이 날아 왔다. 건물이 들어서 있는 땅이 지구단위계획으로 ‘법적근거’를 갖춘 개발지역이란 문서였다. 그러고 나서 2009년 겨울에는 가게 집기가 들려 나갔다. “용역들이 집기를 들어내는 데 가장이라는 사람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너무 가슴이 아팠어요. 용역들이 집기를 다 들어내고 우리가 가게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문에 철판을 용접해 놓고 갔어요. 하루아침에 자신의 가게를 잃은 아내는 못내 억울한지 한참을 집에 가지 못하고 그 철판 주위를 밤늦게까지 서성거렸죠. 그 모습을 지켜보자니 내가 정말 무능한 가장이구나 하며 한탄할 수밖에 없었어요.”라며 유 씨는 이렇게 당시의 심정을 토로했다.

그는 그런 아내를 보면서도 처음엔 싸울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달랑 우리 집 하나만 남았는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며 그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나 아내 안 씨는 달랐다. 그가 판 우물은 목이 마를 대로 마른 자가 땡볕 아래 판 최후의 샘이었던 것이다. 마침내 철거 이틀 뒤 새벽 안 씨는 절단기로 절판을 뜯어내고 들어가 농성하기 시작했다. 안 씨는 “새 건물주는 처음에 이주비로 300만원을 주겠다고 했어요. 그러나 권리금 1억도 전혀 못 받은 상황에서 이 돈으로 새 장소를 찾을 수가 없었어요. 나아가 개발업자들이 세입자들을 존중하고 협상의 파트너로 생각하도록 만드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어요.”라며 140여일 째 농성 중인 이유를 밝혔다. 이어 “밤에 누워 있으면 공사 때문에 복공판으로 되어 있는 대로변을 쌩쌩 달리는 자동차의 굉음이 마치 괴물이 지나가는 듯 한 느낌을 주게 해요. 이곳에 누워 있으면 모든 게 괴물처럼 느껴집니다. 재개발도, 용역도, 돈도 그렇습니다.”라고 기나긴 농성에 따른 심적 고통을 털어놨다.

■ 문화콘서트홀

▲ 밖에서 보면 사람들이 농성을 하는 건지, 놀고 있는 건지 구별하기 어렵다. 실제로 기자가 두리반을 방문했던 지난 14일엔 신고가 접수됐다며 두 명의 경찰이 이곳을 찾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다양한 재개발 지역에서 철거민과 함께 문화농성을 한 활동가들이 두리반 소식을 듣고 하나둘 찾아와 힘을 보탰다. 그룹 천지인의 멤버였던 엄보컬, 김선수 부부와 조약골씨가 대표적이었다. 설치미술 등을 전공한 한국예술종합학교 졸업생과 재학생들은 건물 3층 빈 공간을 작업실로 쓰겠다고 찾아왔다. 두리반의 투쟁을 기록하고 싶다는 다큐멘터리 감독도 ‘두리반 지킴이’가 됐다. 이들은 지하 1층과 지상 3층, 총 4층짜리 건물에서 벌어지는 사람들의 일상을 기록한다. 엄보컬씨는 “철거민들이 마지막 수단이라는 망루를 쌓기 전에 많은 사람들이 철거 문제에 관심을 보였다면 용산 참사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지금도 안타깝다”며 “두리반은 망루를 쌓기 전에 많은 이들이 연대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 자신을 ‘천재미소녀’라고 소개한 이 모씨는 추운 날씨였음에도 화려한 벨리댄스를 선보였다.
기자가 두리반을 찾았을 때는 ‘칼국수음악회’가 열리는 금요일이었다. 전기도 물도 간신히 흐르는 건물에서 좋은 음향장비나 조명시설 따위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럼에도 민간 개발업자의 철거에 맞서는 두리반에 힘을 보태기 위한 여러 팀과 개인의 공연이 있었다. 추운 날씨였음에도 노출까지 마다하지 않고 멋진 벨리댄스를 보여준 이 모씨는 “두리반에 자그마한 힘이라도 보태기 위해 그동안 갈고닦은 춤을 선보였다”고 공연에 참여하게 된 계기를 밝혔다.

이렇듯 두리반에서의 농성 방식은 사뭇 독특하다. 팔뚝질을 하며 힘찬 구호를 외치고 장중한 민중가요를 따라하는 대신 신나는 통기타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시끌벅적하게 수다를 떤다. 밖에서 보면 농성을 하는 건지, 놀고 있는 건지 구별하기 어렵다. 두리반 식구이자 가수인 조약골씨는 “우아하고 활기차게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을 찾다 이와 같은 공연을 기획하게 됐다”고 전했다. 그는 이어 “재개발 지역에서 벌어지는 문화농성이 철거문제에 관심 없던 대중에게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참여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소망한다”고 부연했다.

두리반에서는 월요일엔 ‘하늘지붕음악회’, 화요일엔 푸른 영상이 지원하는 ‘다큐 상영회’, 목요일엔 ‘촛불예배’, 금요일엔 ‘칼국수음악회’ 그리고 토요일엔 인디밴드라는 이름으로 불리길 거부하는 자립음악가들의 공연이 매주 열리고 있다.

■ ‘용산참사’라는 역사의 기억이 얹혀 있는 작은 용산

안종려씨는 개발 광풍 앞에서 자기 같은 세입자를 보호해줄 법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 ‘상가건물임대차보호법’에 따르면 세입자는 5년간 계속해서 계약 갱신을 요구할 수 있게 돼 있다. 그렇지만 건물주가 자신의 건물을 철거하거나 재건축하려 할 때는 이런 보호 조항이 그야말로 무용지물이었다. 명도소송에서 패소한 안 씨는 심지어 보증금도 돌려받지 못했다. 새 건물주는 소송 중 보증금을 다 까먹었으니 주거 이전비 300만원만 받고 나가라고 했다. 농성은 안 씨가 선택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었던 셈이다. 그는 “땅값은 달라는 대로 다 주고선 세입자에겐 아무런 보상도 해주지 않는다”며 “만약 법이 세입자를 보호해줄 수 있도록 돼 있다면 이렇게까진 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오로지 가진 자만을 보호해주는 법에 대해 비판적으로 말했다. 남편 유채림씨 또한 “부조리한 법, 잘못된 법과 권력의 횡포로 약자는 늘 괴롭힘을 당해왔다”며 “두리반을 반드시 살려야겠다는 것도 있지만 무차별적으로 세입자들이 쫓겨나야만 하는 임대차보호법 등을 바꾸는 것에도 힘을 모야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우리가 어떻게 싸우느냐에 따라 그나마 다른 영세 세입자들이 다른 곳에서 살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작은 용산 두리반에서의 문화농성은 근본적으로 비정한 투기꾼 세상에 일침을 놓아 비록 세입자일지언정 함부로 내칠 수 없다는 선례를 만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이를 이루기 위해 두리반에 모인 이들은 건설사가 지쳐 떨어져 나갈 때까지 화염병 대신 기타를 들고 농성을 축제처럼 즐기고 있다. 그러는 동시에 재개발과 같은 사회문제에 대해 어떠한 선언이나 선동없이 대중 스스로 인식하게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다.

민간개발업자의 강제철거에 맞서 위태롭게 버티고 있는 두리반과 용산 남일당 망루가 상징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같다. 그러나 두리반에는 ‘용산참사’라는 두툼한 역사적 기억이 얹혀있다는 점에서는 다르다. 제 2의 용산은 없어야 한다는 각성, 그것이 다양한 사람들을 두리반으로 이끄는 것은 아닐지. 그렇기에 불침번까지 마다하지 않고 여러 사람이 두리반을 지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민호 기자 sksdlals@dankook.ac.kr

이민호 기자
이민호 기자 다른기사 보기

 sksdlals@dankook.ac.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