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유형원에게 성균관 좨주 벼슬을 더해주다
(43)유형원에게 성균관 좨주 벼슬을 더해주다
  • 김문식(사학) 교수
  • 승인 2010.05.28 13:16
  • 호수 127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훌륭한 저서를 남긴 공적을 인정

고 처사(處士)이자 집의(執義) 겸 진선(進善)에 증직된 유형원은 그가 지은 반계수록(磻溪隨錄) 보유편(補遺編)에서 “수원도호부는 광주(廣州)의 아래 지역인 일용면 등을 합하고, 읍치를 평야 지역으로 옮기면, 시내를 끼고 땅의 형세를 따라 읍성(邑城)을 지을 수 있다. 읍치(邑治)의 규모와 평야가 매우 훌륭하여 큰 번진(藩鎭)의 기상을 지닌 지역으로 안팎으로 1만 호(戶)를 수용할 수가 있다.”라고 하였다. 또 “성을 쌓는 부역은 향군(鄕軍) 가운데 정번(停番)하는 사람이 내는 비용으로 충당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 사람은 실용성이 있는 학문으로 경제(經濟)에 관한 글을 지었으니, 기이하다.


그가 수원의 형편을 논하면서 읍치를 옮기는 계획과 성을 쌓으라는 방략을 말한 것은 백년 전의 사람이면서 오늘날의 일을 훤히 안 것이고, 면을 합치고 정번의 비용을 사용하는 등 세세한 절목도 모두 병부(兵符)를 맞추는 것처럼 딱 들어맞는다. 그의 글을 보고 그의 말을 썼어도 대단한 감회가 있었을 것인데, 그의 글을 보지 못했는데도 본 것 같고 그의 말을 듣지 못했는데도 이미 쓰고 있으니 그 사람이 품은 바가 매우 풍부했다. 화성(華城)에 관한 일에 있어 나는 아침저녁으로 만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중략)


더구나 지금 그에 대한 생각이 일어나는데 어찌 드러내어 권장하는 조치를 빠트릴 수 있겠는가? 성균관 좨주(祭酒)의 직을 더해주고, 그 후손을 방문하여 알려주어라.

용인 백암면에 있는 유형원의 묘소.

1793년(정조 17) 12월에 정조가 작성한 ‘고 처사 유형원에게 성균관 좨주를 더하라는 명령(故處士柳馨遠加贈祭酒敎)’이다.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은 어린 시절에 병자호란을 경험했고, 명과 청이 교체되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조선에서도 전면적인 개혁이 필요함을 절감했다. 그는 32세에 전라도 부안군 우반동으로 이주하여 반계수록이란 책을 지었는데, 여기에는 농촌 경제를 안정시키고 국가 체제를 개혁하는 방안들이 수록되었다. 반계수록은 백년이 지나서야 세상에 알려졌는데, 영조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753년(영조 29)에 사헌부 집의(執義) 겸 세자시강원 진선(進善)이란 벼슬을 내렸다. 또한 반계수록은 1770년(영조 46)에 경상감영에서 목판본으로 인쇄되어 보급되었다.


1793년에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소를 화산(花山) 아래로 옮기고, 수원도호부의 읍치를 지금의 화성(華城)이 있는 곳으로 옮겨 읍성을 쌓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조는 유형원의 반계수록을 읽다가 자신이 시행하고 있던 조치와 똑같은 내용이 책 속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 유형원은 반계수록의 부록인 보유편에서 전국의 군현제를 개혁하자고 했는데, 수원부의 읍치를 평야지대로 옮기고 읍성을 건설하면 1만호를 수용할 수 있는 대도시를 만들 수 있다고 제안했던 것이다. 유형원은 또한 광주의 일용면을 수원부로 합치고, 향군 가운데 군역에 동원되지 않은 사람들이 납부하는 돈을 축성 비용으로 사용하자고 제안했는데, 이 또한 정조가 시행하던 조치와 같았다. 정조는 반계수록을 보지 않고 화성을 건설하는 작업을 진행했는데, 유형원은 이보다 백수십 년을 앞서서 미래를 예견하는 발언을 했던 것이다.


정조는 유형원이 실용적인 학문을 하면서 국가를 다스리는 훌륭한 책을 지은 것으로 평가하고, 자신은 유형원을 만난 적이 없지만 아침저녁으로 늘 만나면서 살아온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두 사람이 구상한 방안이 오랜 시간을 뛰어넘어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정조도 영조처럼 유형원의 벼슬을 더해 주었는데, 세자시강원 찬선(贊善)과 이조참판에 성균관 좨주(祭酒)를 겸하는 벼슬이었다.


유형원은 처사 출신이었지만, 영조와 정조로부터 훌륭한 저서를 남긴 공적을 인정받아 이조참판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김문식(사학) 교수
김문식(사학) 교수

 dkdds@dankook.ac.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