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전·천안캠퍼스 봉사활동
죽전·천안캠퍼스 봉사활동
  • 이건호 기자
  • 승인 2010.08.31 17:01
  • 호수 128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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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기간 긴 여운……해외봉사단의 손길

 ■ 죽전캠퍼스 캄보디아 봉사활동

짧았지만 긴 여운



7박9일 나름 정이 들었다
헤어질 때 훌쩍이는 아이들 보며
발걸음이 쉬 떼이지 않았다


   “쭘립쑤와.” 캄보디아어로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를 나누었지만 생각보다 높은 언어의 장벽이 아이들에게 쉽게 다가가는데 주저함을 더했다. 봉사단은 간단한 캄보디아어를 익혀갔지만 ‘대화’를 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했고 영어특기자, 코디네이터(현지대학생)를 거쳐야 하는 과정에 교육봉사가 간단치 않음을 느꼈다. 봉사단은 환한 미소로 아이들에게 다가갔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다. 교육 동안 긴 침묵의 시간이 이어졌다. 말 없이 묵묵히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다 보니 왠지 더 어색하고 불편한 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아직은 어색하지만 곧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아요.”(이휘용(화학공·1) 군)

▲ 교육 전 아이들과 함께 몸을 풀고 있다.

▲ 페인트칠 전 벽에 붙은 먼지를 제거하는 모습.

   B-2조 종이비행기 접기가 끝난 후 아이들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너무나 즐겁게 종이비행기를 날리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니 그간의 어색하고 힘들었던 시간이 봉사이라도 되는 듯 봉사단 표정에도 웃음이 번졌다. 아이들과 친해지는데 재미있는 이야기나 화려한 선물은 필요치 않았다. 함께 웃고 손을 잡아주고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낯선 땅의 아이들과 따뜻한 정을 나눌 수 있었다. “아이들은 어느 나라나 똑같은 것 같아요. 재미있으면 웃고 슬프면 울고. 그래서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더욱 소중하게 느껴져요.”(김한나(경영·2) 양)

   하루 약 7시간의 봉사는 체력적으로도 많은 인내를 필요로 했다. 쉬는 시간에도 편하게 쉬지 못 하고 땀이 주룩주룩 나는 무더위에 봉사단의 얼굴에 힘든 표정이 드러났다. 하지만 그런 내색을 할 수 없는 게 또 봉사단의 위치였다. “점심시간 쯤 되어서 일부 단원들이 지치고 의욕이 떨어진 모습을 보였는데 학생들이 이를 눈치 채고 물어볼 게 있어도 활기 있는 단원을 찾아서 질문하는 모습을 보였어요. 힘들어도 참고 끝까지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복이슬(경영·4) 양)
▲ 우리나라의 전통놀이인 윷놀이를 배우고 있는 아이들.
▲ 너무 즐거운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모든 일정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오는 버스. 대부분의 단원들이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힘든 일정이었던 만큼 보람도 컸기에 단원들의 표정은 무척이나 밝았다. “낯설고 힘든 부분이 많을 텐데도 잘 해주었어요. 현지 학생들과의 거리감이나 거부감 없이 교육을 진행했고, 특히 모든 단원들이 말은 안 통해도 학생들과의 소통을 위해 노력한 점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전길송(화학공·4) 총학생회장)

   하루하루 지날수록 봉사단의 교육봉사 실력이 나아졌다. 아이들이 봉사단원들을 무척이나 잘 따랐고 봉사단이 가는 곳에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더운데 아이들이 너무 잘해주고 쉽게 따라와 주는 것 같아요. 태권도가 쉽지 않은 운동인데 능동적으로 따라와 줘서 오히려 가르치는 입장에서 고마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원성희(경영·3) 군)
▲ 신나는 율동을 가르치고 있는 홍지은(경영정보·3) 양.
▲ 멋지게 격파 성공! 태권도팀의 공연 모습.

   봉사단은 교육봉사 외에도 페인트칠과 태권도 공연, 배구장 제작 등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준비해 행복을 선사했다. 힘든 일정이었지만 일주일은 너무도 금방 지나갔다. 좀 더 많은 것들을 가르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쯤 우리는 헤어짐을 준비해야 했다. 어떤 이는 담담하게 어떤 이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그렇게 각자의 방식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코디네이터도 봉사단과 함께한 아이들도 아쉬움이 컸다. “슬프고 (봉사단원들이) 안 돌아갔으면 좋겠다. 조심해서 잘 돌아가기를 바라고 나도 나중에 어른이 되면 다른 지역에서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고 싶다.”(니따(15) 양)

   7박 9일은 우리가 바라고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것들을 실현하기에 너무도 짧은 시간이었다. 힘들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지만 마지막날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더 좋은 교육을 할 수 있었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남았다. 이러한 마음을 갖고 돌아가는 봉사단에게 귀국은 끝이 아니라 더 큰 봉사를 위한 시작일 것이다. “국내에 어려운 사람이 많은 데도 비용이 많이 드는 해외 봉사활동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학생들이 타지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느끼는 것들을 플러스, 마이너스로 놓고 봤을 때 플러스가 더 큰 편입니다. 이곳에서 많은 것을 느낀 학생들이 국내에 돌아가서도 그러한 따뜻한 마음을 잊지 않고 더 활발한 봉사활동을 펼칠 것이라 생각합니다.”(심상신(체육교육) 학생지원처장) 더위, 타국에서의 어려움, 언어적 장벽 속에서도 아낌없이 사랑을 베풀었고 더 큰 사랑을 배우고 돌아온 여정이었다. 



이건호 기자 GoNoiDa@dankook.ac.kr

 


 ■ 천안캠퍼스 몽골 봉사활동

“사랑해요” 메세지를 받고…



4일간 8백여명 진료
고혈압 환자 돌려보낼 때
가장 가슴이 아팠다



   6월 19일 토요일 인천공항에서 몽골의 울란바토르 공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해외로 떠난다는 설렘과 태어나 처음 보게 되는 몽골의 광경에 대한 신선한 두려움에 기내에서 지루함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둘째 날부터 본격적으로 의료봉사가 진행되었는데 7시에 기상하여 준비를 마친 후 울란바토르 시내에서 8시에 출발하였다. 8시 반 정도에 도착한 가쵸르트 학교 입구에 서있는 200여명의 환자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루 동안 진료해야할 환자들이 아침부터 와있다니.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수의 환자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우선 접수와 안내를 담당하기로 한 나와 치과대학 동수 오빠는 함께 무질서하게 서있는 환자들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 현지 아이들과 의료봉사팀 도화연(행정·3) 양.
▲ 엄마의 진료를 기다리고 있는 아이와 도화연 양.

   몽골어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수많은 환자에게 웃으며 조금만 뒤로 서서 차례를 지켜달라는 애원에 가까운 바디랭귀지 밖에 내 보일 수 없었다. 질서유지가 30분 만에 끝나고 9시부터 본격적인 진료가 시작되었다. 본격적인 진료에 앞서 접수와 예진을 하게 되는데, 접수에서는 전신건강 상태를 점검하게 되었다. 나는 여기서 혈압을 측정하는 일을 했다. 그 곳 사람들은 채소나 생선이 귀하기 때문에, 양고기나 말고기와 같은 육류 섭취가 많아 고혈압을 가진 환자들이 많았다. 고혈압을 가진 환자는 진료를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돌려보내야 했다. 그 환자들이 진료를 받기 위해 새벽부터 일어나서 하루 종일 줄 서왔던 노력과 수고를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과 함께 안타까운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그래서 차마 빈손으로 돌려보낼 수 없어, 준비해온 치약과 칫솔을 나눠주며 조금이나마 스스로 위안을 삼았다.

   어린아이조차 양치가 제대로 되지 않아 유치 모두가 썩어 있어 치료가 불가능해져 불소도포라는 치아부식을 예방해주는 조치를 취해 주었다. 특히 몽골에서는 보철환자들의 수요가 많았었는데, 기공사분이 부족했고, 틀니를 제작하기 위한 과정에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문제 있어서 보철환자들을 많이 진료하지 못했던 것이 가장 안타까웠다. 보철과 교수님께서는 틀니환자의 고충을 충분히 이해하시어, 재료와 시간이 부족해서 다 봐드리지 못해 아쉽고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셨다.
▲ 몽골 현지 간호사(우)와 그녀의 딸(좌).
▲ 의료봉사팀과 현지 통역사들.

   첫째 날 241명의 환자를 진료한데 이어, 봉사기간 동안 한 분의 환자라도 더 진료하기 위해서 야간진료까지 마다하지 않으셨던 교수님과 선생님들의 환자를 향한 열정에 셋째 날 256명의 의료봉사사상 일일 최대의 환자를 진료하였다.

   4일간 총 326명의 발치, 201명의 수복 치료, 57명의 임시 의치 제작 등을 통해 총 815명의 환자를 진료하게 되었다.

   마지막 진료가 끝나고 아쉬운 마음에 정리를 시작하는데 몽골의 한 소녀가 나에게 와서 작은 편지를 건냈다. 한켠에 한국어로 쓰인 “사랑해요” 라는 메시지와 함께.
▲ 몽골 현지 아주머니가 의료봉사팀에게 충치치료 및 발치치료를 받고 있다.
▲ 발치치료를 하고 있는 의료봉사팀.

   그 친구는 우연히 나와 같이 사진을 찍게 되었는데 봉사기간 내내 나와 마주치게 되면 너무도 반갑게 인사를 해주었다. 마지막 날 이젠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하니 집에서 편지를 써서 진료실로 가져왔다고 했다. 서로의 이메일을 건네주고는 한국에서 다시 만나자는 약속과 함께 친구를 꼭 안아주고 돌려보내는데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정작 이 친구는 진료를 받았던 것도 아니었는데 웃고 인사했던 것만으로도 나를 생각했던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돌이켜보면 봉사활동을 하는 기간 내내 안타깝고 미안한 마음이 참 많이 들었던 것 같다. 한국에서 다 조달할 수 없었던 기구와 재료의 부족이나 시간상의 제약들. 실망하고 화내며 돌아가는 환자들을 생각하면 모두가 기분이 울적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료를 받고 칫솔 하나 받아가면서 고맙다며 손을 꼭 잡아주시던 할머님과 내일 떠난다는 우리에게 ‘너무나 감사해 세상의 모든 복이 당신에게 내리길 기원한다’며 직접 쓴 편지를 건네며 아쉬움의 눈물을 흘리던 한 어린 친구가 있었기에 낯선 나라 몽골에 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움을 주러 몽골로 떠난 우리는 오히려 그들로부터 더 큰 선물을 받고 돌아왔다. 



도화연(행정·3)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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