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권리행사와 권리남용
(36)권리행사와 권리남용
  • 최호진(법학) 교수
  • 승인 2010.09.07 17:11
  • 호수 128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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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계약금미지급을 이유로 계약을 해지를 할 수 있는가?


갑은 6월 1일 을의 땅을 총 3억 원에 매입하기로 계약한 후 계약금으로 3천만원을 7월 1일에, 중도금으로 2억 원을 8월1일에 지급한 후 나머지 잔금 7천만원을 9월 1일에 지급하면 소유권이전등기에 필요한 서류를 넘겨주기로 하였다. 약속한 9월 1일에 갑은 잔액 7천만원 중 200만원이 모자라게 되었다. 그러자 을은 “200만 원 정도이면 기다려 줄 수 있다”고 하자, 갑은 200만원을 한 달 후에 5부이자로 해서 잔금을 지급할 터이니 등기를 이전해달라고 하였으며, 이에 을은 승낙을 하였다. 그런데 며칠 후 을은 자신이 갑에게 판 땅이 재개발로 인하여 땅값이 3배나 뛰어 오를 것 같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이에 을은 갑에게 잔금기일을 어겼으니 부동산매도계약을 해제하겠다고 하며, 그동안 받은 2억 9천 8백만 원을 돌려주려고 한다. 과연 을은 갑에 대하여 부동산매도계약을 해제할 수 있는가?


계약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법원칙에 충실하게 본다면 을은 갑의 잔금지급채무 불이행을 이유로 하여 매매계약을 해제할 권리가 있어 보인다. 갑은 지정된 기일에 부동산매매대금을 을에게 지불하여야 하는데, 갑은 마지막 계약금을 -극히 일부분이라고 하더라도- 지급하지 못했기 때문에 계약을 이행하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을은 갑의 불이행을 이유로 부동산매매계약을 해제할 수 있다.


그러나 매매대금 중 극히 일부분의 계약금 미지급을 이유로 계약전체를 해제하려 한다는 것은 일반적인 거래관계에 있어서 사회의 일반적 믿음과 어긋난다. 예를 들어 150만원 상당의 컴퓨터 구입을 하면서 판매업자가 USB를 사은품으로 주기로 하였는데, 물건을 인도받는 날 약속한 USB가 아닌 공CD를 주었다는 이유로 전체 계약을 해제하는 것과 같으며, 12시까지 음식을 배달시켰는데, 12시10분에 음식이 도착했다고 하여 음식배달을 취소하는 것과 같다.


법은 정의와 도덕에 기초하므로 법에 의한 권리행사 역시 사회의 믿음에 따라 신의에 따라 성실하게 행사하여야 하며, 이를 신의성실의 원칙이라고 한다. 이 원칙은 사회공동생활의 일원으로서 각자는 서로 상대방의 신뢰를 헛되이 하지 않도록 신의에 비추어 성실하게 행동하여야 한다는 원칙을 말한다. 민법은 제2조 제1항에서 “권리의 행사와 의무의 이행은 신의에 좇아 성실히 하여야 한다”고 규정하여 이를 선언하고 있다. 원래 ‘신의’와 ‘성실’의 개념은 사람의 행동이나 태도에 대한 윤리적·도덕적 평가를 나타내는 것이다. 법학에서 신의성실의 원칙의 기능은 아주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권리남용금지의 원칙이다. 즉 자신에게 권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를 남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남용된 권리행사는 법이 인정해주지 않겠다는 것이다. 또한 권리자가 장기간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고, 그로부터 상대방도 권리자가 권리를 행사하지 않으리라고 신뢰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이르러 권리자가 새삼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상대방으로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할 때에는 권리자의 이와 같은 권리행사를 제한하는 원칙을 말한다.


위 사례의 경우 을의 계약해제는 무효이며, 땅은 갑의 것이 된다. 다만 갑은 잔금과 이자를 지급해야 하며, 만약 을이 잔금을 받지 않으면 그 돈을 법원에 공탁해두면 된다. 공탁은 채권자가 빚을 받지 않으려고 하거나 받을 수 없는 경우, 혹은 채권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경우에 채무자가 돈을 법원에 맡겨두는 것을 말한다. 공탁을 하게 되면 법적으로 채권자에게 지불할 것과 같은 효력이 발생한다. 최근 천안함 침몰로 사망한 병사의 아버지가 갑자기 나타나 고인의 사망보상금 중 절반을 몰래 찾아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법적으로 보상금을 청구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하지만, 그 권리가 정당한 권리행사가 될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최호진(법학) 교수
최호진(법학) 교수

 dkdd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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