⑫ 허균의 『국조시산(國朝詩刪)』
⑫ 허균의 『국조시산(國朝詩刪)』
  • 김철웅 연구원
  • 승인 2010.09.07 17:23
  • 호수 128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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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은 버릴 수 있으나 그가 편집한 책은 오히려 버릴 수가 없다”

   허균(1569~1618)은 불운한 인물이었다. 『홍길동전』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는 허균은 광해군의 총애를 받아 정2품인 좌참찬에 올랐으나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기준격의 상소로 인해 참수형을 당해 생을 마감했다. 『광해군일기』에는 “임금께서 허균의 역모와 관련하여 사실 관계를 더 파악하려고 하였으나 권신들의 강압으로 형을 집행할 수 밖에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어 그의 역모설에는 의혹이 있다. 인조반정 이후 광해군 때의 옥사에서 희생된 사람들은 거의 복권되었으나, 허균 만은 복권되지 않고 여전히 역적으로 남아 있었다. 따라서 허균은 조선시대 내내 기피인물이었다. 그리하여 『성소부부고』와 『한정록』 등 그의 저작물들은 간행되지 못하고 일부 사람들에 의해 필사(筆寫)로 전해지며 읽혀졌다. 그러나 그의 저작 중 『국조시산』은 다행히 박태순(1653~1704)의 노력으로 간행될 수 있었다.

▲ 강릉시 초당동에 있는 허균의 생가.

   『국조시산』은 허균이 엮은 시선집(詩選集)으로 광주부윤 박태순이 1697년에 간행하였다. 박태순은 『국조시산』의 간행 서문에서, “그 사람은 버릴 수 있으나 그가 편집한 것은 오히려 버릴 수 없다. 우리 나라의 시선집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이것이 가장 잘 되었다고 일컬어지므로 후대에 전하지 않을 수 없음은 분명하다”고 했다. 원래 『국조시산』은 1607년에 완성되어 여러 사람들에 의해 좋은 시선집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으나 허균이 역모 사건에 연루되었기 때문에 간행이 늦어진 것이다. 『국조시산』에는 정도전(1342~1398)에서 권필(1569~1612)까지 조선초~중기에 활동한 35명의 시 889수를 실었다. 그런데 시만 실은 것이 아니라 비(批)와 평(評)을 달아 놓았다. 허균은 비(批)에서 시를 품평하여 작품 이해에 도움을 주었고, 평(評)으로서 시문을 논의하고 잘못된 것이 있으면 고치기도 했다. 또 보주(補注)에서 작자를 소개하였고, 시와 관련된 이야기나 평가 등도 소개하였다. 또한 양반사대부의 시만이 아니라 여인, 승려, 도인 등을 비롯해 무명 작가의 시도 실어 놓았다. 함경도 변방의 군관이 지은 “세상에 뛰어난 인물 알아 주는 이 없으니/황금으로 누가 높은 대를 쌓아주랴/변방 서리가 검은 귀밑거리를 다 물들이도록/한 필 말로 변방을 열 차례나 오고 갔네”라는 시를 소개하였고, “나무 빗으로 빗고 참빗으로 또 빗어/천 번 빗질에 이가 이제 없어졌네/어찌하면 만 길 되는 큰 빗을 구해/백성들의 이를 남김없이 빗어낼까”라는 무명 작가의 시도 실어 놓았다.

   허균은 고귀한 신분이건 천대 받은 신분이건, 그리고 차별 받은 여성인지를 따지지 않고 오로지 시의 잘 되고 못됨에 따라 시를 선별한 것이다. 『국조시산』은 우리나라 역대 시선집 중에서도 시의 선발 기준이 명확하고 작품에 대한 비평이 있어 가장 우수한 시선집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허균의 저작이라는 원죄는 여전하였다. 간행된 지 3년 후인 1700년에 유생 3백여 명이 율곡 이이를 비방하고자 율곡의 시를 위작하여 실었다고 하여 『국조시산』을 폐기할 것을 상소하였다. 이 일은 박태순의 파직으로 종결되었으나 여전히 허균은 금기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에도 불구하고 시에 대한 허균의 안목은 여전히 높게 평가되고 있었다. 1712년에 연행을 다녀온 김창업의 기록에 의하면, “(청)황제께서 꼭 조선의 글을 보고 싶어하여 비록 한두 구절 부채쪽에 쓴 것이라도 있다면 가져다 보여 드리려고 하였는데, 마침 짐 속에 『국조시산』이 있어 35수를 뽑아서 잘 베껴 책을 만들어 바쳤다”고 한다. 그리고 홍만종은 『시화총림』에서, “허균의 『국조시산』은 택당 이식 등 여러 사람들이 가장 잘 뽑아 놓은 책이라고 칭찬하였으니, 이 책이 세상에 널리 읽히게 된 것은 바로 이들의 칭찬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한편 정조는 『일득록』에서, “옛 사람들의 문장을 가려 뽑는 일이 매우 어려운데 그중에서도 시를 가려 뽑는 일이 더욱 어렵다. 우리나라의 『국조시산』, 『기아(箕雅)』 등은 글을 선정하는 규법을 잃지 않았다”고 평가하였다. 우리 대학에는 『국조시산』 필사본이 여럿 소장되어 있다.


김철웅(동양학연구소) 연구원

김철웅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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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kdd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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