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작가 페스티벌 기조발제 - 바다의 시 정신 고은 (우리 대학 석좌교수) 시인
세계작가 페스티벌 기조발제 - 바다의 시 정신 고은 (우리 대학 석좌교수) 시인
  • 고민정 기자
  • 승인 2010.10.13 16:13
  • 호수 128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는 인간만이 아닌 바다와 우주의 것”

 

▲지난 3,4,5일에 열린 세계작가페스티벌의 추진위원회 부위원장인 고은 시인(단국대 석좌교수)

 

저에게는 이루지 못할 꿈이 있습니다. 시가 문학의 한 형식인 것을 벗어난 초문학적인 표현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시는 문학 또는 예술 이상입니다. 또한 시는 인간의 언어 이전부터 있다는 세계운행의 표현이며 그 세계 안에 깃든 온갖 생명체의 본성적인 율동이므로 인간이 전유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도 뒤따릅니다. 따라서 인간의 관습언어로서의 시는 자연언어에의 반조(返照)가 있어야 한다는 꿈도 저버릴 수 없습니다.

저 달과의 오랜 혈연으로 이어져오는 지구상의 바다 간만(干滿)의 파도 소리를 내 문체로 삼는다면 얼마나 황홀하겠습니까. 행여 내 시의 어느 날 이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 이루어짐으로써 바다가 내 무덤이 될 미래의 기억을 낳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리하여 뼈도 이름도 필요 없는 어느 파도 자락의 묘표(墓標)가 물결치는 것이면 더 바랄 나위가 없습니다.

그 바다 저쪽 수평선 너머 먼 곳, 미지의 곳과의 영혼 소통으로 시는 있습니다. 그 누가 감히 이런 바다의 시혼(詩魂)을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까지 있어온 시의 온갖 형식과 사조(思潮), 온갖 시의 성취와 실패들을 다 불러들여 해류에 싣고 떠다니며 그것들을 파도치게 함으로써 세계 시 5천 년의 집적으로부터 새로운 시의 원년(元年)을 이루기를 나는 열망합니다.

서정과 서사, 묘사와 서술, 의도와 지동서술 등의 온갖 구별을 폐기한 시적 변혁을 통해서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시의 신생을 추구합니다. ‘시가 죽었다’ ‘시가 사라졌다’는 오늘날의 낯익은 속담은 옳습니다. 죽어야 합니다. 당시(唐詩)가 만당(晩唐)의 시로 우수수 낙엽 질 때 그곳에 송시(宋詩)의 긴 호흡이 있었던 것입니다.

시는 누구의 제자, 누구의 노예가 쓰는 것이 아니라 파도 위의 고아가 노래하는 것입니다. 부서지는 것은 바위이지 바다가 아니라는 강력한 고백이야말로 ‘바다의 시’ 시대의 도래에 유효할 것입니다.
시는 인간의 것만이 아닌 것, 바다의 것 그리고 우주의 것입니다. 우주 본연으로서의 숨결이고 파도이고 혼의 세부(細部)인 시가 우리에게 오고 있습니다.

고대 중국의 시인 이백은 “푸른 하늘을 한 장의 종이로 삼아 내 배 속에서 터져 나오는 시를 쓰노라.”라고 노래했습니다. 근대 한국의 시인 신석정은 “아직 한 사람의 시인도 손을 대어 본 적이 없는 푸른 원고지”라고 바다를 그렸습니다. 그 푸른 원고지가 우리를 기다립니다. 시는 유희가 아닙니다. 고급의 오락도 아닙니다. 그 무엇도 아닙니다. 시의 정의(定義)는 불가능합니다. 바다의 시 정신에 대한 정의 역시 불가능합니다. 정의 없이 나는 나를 벗어나 바다의 한 시인이고자 합니다.

 

 

고민정 기자
고민정 기자 다른기사 보기

 mjko921@dankook.ac.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