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구속 입건
불구속 입건
  • 이건호 기자
  • 승인 2010.11.05 14:50
  • 호수 128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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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 평등은 사회적 약자를 위함인가 강자를 위함인가

   ◇판사가 판결문을 꺼내들자 법정은 고요해졌다. “피고인들은 청각장애인 교육기관의 교사로서 어린 학생들을 성폭행한 점을 미루어볼 때 죄질이 매우 나쁘다.…하지만 그동안 지역사회에 기여한 바가 크고, 또 전과가 없는 점, 또한 이들 중 성폭행을 당한 학생의 보호자들이 그동안 피고인들이 자신의 아이들을 잘 돌봐준 것을 감안하여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탄원서를 낸 것을 참작하고,…판사의 선고가 끝나고 수화통역사가 마지막 숫자와 함께 집행유예라는 것을 알리자 여기저기서 괴성이 뿜어져나왔다. “전과가 없다니! 십여년간 수십명을 성폭행했는데 집행유예라니!”(소설 『도가니』(작가: 공지영) 중에서)


   ◇지난달 지적장애 여중생을 한 달가량 성폭행한 16명의 고교생들을 경찰은 전원 불구속 입건 처리했다. 가해학생들이 미성년자이며 피해자인 여중생이 강하게 저항하지 않았던 점, 폭력이 행사되지 않았던 점 등이 불구속 입건의 이유였다. 사회적 약자인 장애인에게 가해진 끔찍한 범죄에 대하여 이토록 논리적이고 배려 깊은 판결이 내려질 수 있다는 데 메스꺼움과 역한 감정이 밀려왔다. 마치 그들을 지켜주지 못한 것이, 그들에게 올바른 처벌을 내리지 못한 것이 내 탓이라도 되는 양 부끄러웠다. 몇 년 전에는 지적장애를 앓는 소녀를 10여 년간 성폭행한 일가족에게 어려운 경제적 형편에도 부모를 대신해 피해자를 키워왔다는 점을 들어 집행유예를 선고한 판결도 있었다. 드라마 <대물>에서 남편을 잃은 고현정의 “우린 누굴 믿고 살아야 합니까. 이 나라를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라는 외침이 들리는 듯 했다.


   ◇사회 곳곳에서는 끔찍한 범죄들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달에는 만취상태로 병원에서 난동을 부리며 병원기사를 폭행한 혐의로 체포돼 파출소로 인계되던 여성이 여경의 귀를 1.5㎝가량 물어뜯고 이를 씹어서 봉합조차 못하게 만드는 사건이 있었다. 경찰은 공무집행 방해와 상해 등의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으나, 법원은 가해자가 범행을 인정하고 증거인멸과 도주우려가 없으며 피해자를 위해 1천만 원의 공탁금을 접수한 점 등을 들어 영장을 기각했다. 강력한 돈의 힘 앞에 이 사건도 묻혀버리는 듯 했으나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지난 6월 출범한 검찰시민위원회 위원들은 사건의 죄질이 가볍지 않음을 고려해 구속영장 재청구 의견을 제시했고 이날 오전 가해자는 교도소에 수감됐다.


   ◇불구속 입건은 본래 좋은 취지로 만들어진 제도이다. 그 시작은 도덕적으로 좋은 일을 하고 있거나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이들이 단 한 번의 잘못으로 그들의 선행의 결과가 무너지는 것을 막고자 함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좋은 취지는 사라진지 오래고, 돈과 권력이 있는 자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덮기 위한 방편으로 전락해 버렸다. 요리조리 법의 모퉁이에서 수많은 악행들을 저지르는 이들에게 사회 각계의 시민들로 구성된 검찰시민위원회의 출현은 상당한 위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법의 영역이 아닌 상식의 영역을 책임져 줄 검찰시민위원회의 역할로 우리 사회의 기본적인 도덕이 복귀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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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oNoiDa@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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