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의백의 『연행일기(燕行日記)』
임의백의 『연행일기(燕行日記)』
  • 김철웅 연구원
  • 승인 2010.11.09 20:52
  • 호수 1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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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백 필의 말을 부리니 청(淸)은 말(馬)로써 천하를 평정한 것이다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등 이른바 실학자들은 새로운 제도와 학풍을 역설했는데, 이들의 또 다른 공통점은 연행사(燕行使)의 일원으로 청(淸)에 가서 보고 들은 바를 기록하였고 그것이 널리 읽혀지면서 조선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는 사실이다. 즉 박지원은 『열하일기』를, 홍대용은 『담헌일기』를 통해 청의 발전상과 문물의 융성함을 조선에 소개하였다. 이른바 연행사는 조선이 청에 보낸 사신으로, 병자호란을 계기로 조선이 청에 항복한 인조 15년(1637)부터 고종 30년(1893)까지 257년간 약 500회에 걸쳐 파견되었다. 이 연행에 대한 기록, 즉 『열하일기』, 『담헌일기』와 같은 연행록이 상당수 남아있는데 우리 대학에는 임의백(任義伯)의 『연행일기』가 소장되어 있다.

   임의백(1605~1667)은 예학에 정통한 김장생의 제자로 송시열, 송준길과 가까웠다. 그리하여 그는 김장생의 저서인 『경서변의』를 송시열과 함께 간행하기도 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임의백은 충청도로 피난하여 피해를 입지 않았다. 호란 이후인 1649년에 급제한 임의백은 관찰사와 승지 등 중앙과 지방의 주요 관직을 거쳤으며, 1664년에는 한성부좌윤으로 있으면서 부사(副使)가 되어 청에 사신을 가게 되었다. 이 연행사의 상사(上使)는 우의정 홍명하(1608~1667)였다. 사신 일행은 1664년 2월 13일에 서울을 출발하여 요동, 산해관 등을 거쳐 4월 7일에야 청의 수도인 연경에 도착하였다. 약 한 달 가량을 체류한 이들은 5월 4일에 연경을 출발하여 다음달 13일에 서울에 도착하여 사신의 임무를 마쳤다.

▲ 연행도(燕行圖)에 묘사된 연경의 조양문.

   『연행일기』에 따르면 사신 일행은 출발하는 날부터 궂은 날씨로 고생했다. 번개가 치고 비가 많이 오는데도 이를 무릅쓰고 예궐하여 임금을 뵈었고, 이후에도 비 때문에 교량이 무너져 강을 건너는데 매우 고생했다. 특히 요동에서는 비 때문에 가지고 가던 물품 일부가 젖게 되었고, 게다가 얼었던 땅이 녹아 진창길이 되어 사람과 말이 넘어지는 곤욕을 겪었다. 이때 여러 차례 연행을 오고 갔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와 같은 낭패는 일찍이 본 적이 없다”고 하였다. 임의백은 이러한 연행길의 사정 뿐 아니라 청의 정세와 풍속을 상세히 기록했다. 요동의 봉황성에서 임의백은 말을 탄 청나라 사람들이 쇠사슬을 목에 매어 한 사람을 압송해 가는 것을 목격했는데, 그는 달아난 한인(漢人) 노예로 잡아 가는 중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청나라 사람들은 활과 칼을 지니고 다니는데 이는 무예를 숭상하는 습속”이라고 하였고, “한 사람이 능히 백 필의 말을 부리니 청나라 사람은 말(馬)로써 천하를 평정한 것이다”라고 했다. 한편 임의백은 연행길에 병자호란으로 끌려간 조선 사람들을 여럿 만났다. 박일득은 군관의 아들로 16살에 잡혀와 요동성에 살게 되었다고 한다. 소릉하에서 만난 조선 사람은 서울 서소문 안에 살던 판부사 댁의 종으로 이름은 ‘막복’이었다. 우장에 살던 조선 여인은 아버지와 함께 잡혀왔는데, 아버지는 몽골 땅에 있고 자신은 중국인과 결혼해 살고 있다고 하였다. 임의백은 이들을 통해 청에 대한 여러 사실들을 탐문할 수 있었다. 즉, “요동 각지에는 청(淸)·한(漢)의 두 장수가 다스리는데, 청장(淸將)이 지휘하며 한장(漢將)은 모두 일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니 권한이 매우 가볍다”, “한인(漢人)과 청인(淸人)이 서로 소송하면 한인이 이기지 못한다”, “비록 한인을 박대하나 높은 관직에 오른 자가 있어 한인의 대우가 조선인보다 낫다”는 등의 사실을 전해주었다. 또한 임의백은 연행길에 본 고적과 산천의 풍경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북방과 중국 대륙을 잇는 관문인 산해관에 도착하였을 때 바람이 불고 모래가 날려 눈을 뜰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가마 창문으로 고산 준봉 위에 이어진 만리장성을 보았다. 그리고 산해관과 만리장성은 날아가는 새도 넘어가기 힘들다고 소감을 기록했다. 그러면서 천 년이 지났어도 만리장성은 지금 완연히 남아 있으니 진시황은 비록 폭군이지만 영웅이라고도 할 만하다고 평하였다.


김철웅(동양학연구소) 연구원

김철웅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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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kdd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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