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군 포격의 현장, 연평도를 가다
북한군 포격의 현장, 연평도를 가다
  • 이상만 기자
  • 승인 2010.11.30 17:10
  • 호수 1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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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포성, 떨림 속의 40분

북한군 포격의 현장
연평도를 가다

연평도로 향하는 걸음은 무거웠다. 전날 서정우 학우의 영결식이 있었던 터라 더 그랬는지도 몰랐다. 한편으로는 연평도에 들어갈 수나 있을까 하는 의문이 걸음을 더욱 무겁게 했다. <편집자 주>

끝나지 않은 포성, 떨림 속의 40분

 

▲ 해군의 148톤 급 고속함 333호가 포성이 울린 11시 20분부터 연평도 섬을 돌며 정찰하고 있다.

연평도 피격 후 엿새째 되는 28일은 서해상에서 한·미연합훈련이 시작된 날이다. 한반도의 긴장이 고조된 가운데, 오전 9시 30분 인천연안부두에서 국·내외 50여 명의 취재진과 3명의 현지 주민을 태운 페리호가 연평도를 향해 출항했다.

09:30 평온한 바다
파고 1.5~2.5m의 비교적 잔잔한 바다가 페리호를 맞았다. 우려했던 북한의 추가 도발 소식은 없었다. 배 안에선 위성 DMB를 통해 실시간으로 뉴스를 접할 수 있었다. 뉴스 앵커는 “서해 한·미연합훈련 첫 날인 오늘, 날씨는 좋고, 연평도는 평온을 찾아가고 있다.”고 전했다.

11:22 긴급 대피령
페리호가 소연평도에 다다를 즈음, 텔레비전에서 뉴스 앵커의 다급한 목소리가 전해졌다. “4분 전, 연평도에 긴급 대피령이 내려졌습니다!” 상황은 긴박하게 돌아가는 듯 했다. 배안의 기자들도 술렁이기 시작했다. 배는 곧 소연평도 항구에 도착했다. 바다 위에는 이미 해군의 148톤 급 고속함 333호와 해양경찰의 500톤 급 경비정 502호, 고무보트를 탄 특수부대원들이 30노트 정도의 속력으로 빠르게 섬 주변을 돌고 있었다. 모두가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미국의 FOX 네트워크, 중국의 CCTV, 일본의 NHK, 스페인의 TVE 등 외신 기자들은 카메라 앞에서 격한 어투로 긴박한 상황을 각 나라말로 전했다.

11:30 이어지는 포성
잠시 후 페리호 관계자는 승객들을 급히 불러 모았다. “상황이 어떻게 악화될지 모르는 관계로 인천항으로 되돌아가겠다.”는 것이다. 국·내외 기자들은 “Not going Yoenpyeong?!”, “이런 게 어딨어!”라며 성난 소리를 질러댔다. 대연평도 주민 고대진(45)씨는 “집이 바로 저긴데…”라며 안타깝게 섬을 바라봤다. 인천항으로 회항하는 이유는 북한 쪽에서 들려오는 포성 때문이었다. 11시 16분에 첫 번째 포성이 있었고, 30분에 또 다른 포성이 이어졌다. 군은 이날 총 21발의 포성이 있었다고 발표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소연평도 주민 3명이 섬에서 빠져나왔다. 고연심(51) 씨는 “괜찮을 것 같아서 여태껏 남아있었는데, 사이렌이 또 울리니 불안해서 더 이상 있을 수가 없다”며 배에 올랐다.

11:58 다시 대연평도로
인천항으로 되돌아가는 줄 알았던 배가 다시 대연평도를 향했다. 대피령이 40분 만에 해제된 것이다. 포성은 북한의 자체훈련인 것으로 알려졌다. 긴급 대피령의 흥분이 가시지 않은 사람들은 갑판에서 담배를 태우며 조금씩 다가오는 대연평도를 바라봤다. 항구에는 무장한 해양경찰 특공대 SSAT와 해군 관계자들이 나와 있었다.

▲ 다리에 붕대를 감고 배에 오르는 해병, 그는 취재진의 질문에도 전혀 입을 열지 않았다.

12:15 숨 돌릴 틈도 없이
배가 육지에 닿자마자 상륙작전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사람들은 우르르 빠져나왔고, 군인들은 식량과 물자를 바삐 날랐다. 페리호에 달린 스피커에선 “배가 곧 출발하니 빨리 탑승하라.”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대연평도에선 5명의 주민이 섬을 빠져나왔다. 다리에 붕대를 감은 채 목발을 짚고 배에 오르는 부상당한 해병도 있었다. 배를 타기 전에는 폭발물을 감지하는 철저한 몸수색이 있었다.

▲ 군인들이 주민들의 식량과 각 언론사에서 보내온 취재진들의 물품 등을 배에서 육지로 옮기고 있다.


▲ 인천항으로 가는 배에 오르기 전 폭발물을 탐지하기 위해 몸을 수색하는 모습.


12:35 긴박한 상황 속 짧은 만남
페리호는 그렇게 잠시 동안 섬에 머물렀다. 맞교대를 하는 기자들은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헤어졌다. 인천항으로 돌아가는 배에 탄 외신 기자들은 섬에 남은 기자들을 향해 “Good Luck!”이라 외치며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였다.

▲ 북한의 포성 후 대연평도로 돌아온 페리호를 마중나온 해양특수경찰 SSAT와 해군들.


14:30 중국의 중대 발표?
중국은 미디어를 통해 5시 30분에 ‘Hot Issue’에 대한 중대 발표가 있을 것이라 밝혔다. 후에 중국이 6자 회담을 제의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이 날은 이명박 대통령이 다이빙궈(戴秉國) 중국 국무위원과 2시간 동안 면담을 했던 날이기도 하다. 청와대에서는 “6자 회담은 지금 논의할 때가 아니다.”라는 입장을 표했다. 이어 다이빙궈 국무위원은 한반도 평화를 위한 전략적 협력 강화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기존 입장만 되풀이했다고 전했다. 연평도의 긴장 상태는 좀처럼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 스페인 국영방송국 TVE 기자가 포성이 울린 직후의 긴박한 연평도 상황을 전하고 있다.

20:50 軍, 150여 명의 취재진 강제 철수 실패
이 날 오전, 포성을 감지한 국방부는 취재진의 강제 철수를 통보했다. 연평도는 북한의 도발을 예측할 수 없어 통합방위 ‘을종 사태’가 선포된 상태이며, 취재진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취재진이 남더라도 취재는 금지하겠다고 했다. 취재진 철수를 위해 군은 경비함정 503호를 대기시켰다. 하지만 취재진 대부분은 “주민 31명과 외신기자들이 남아있는데 우리만 떠날 수 없다. 전쟁터에서 취재를 금지하는 건 국민의 알권리를 침해하는 언론통제다.”라며 섬에 남기를 고집했다. 게다가 기상악화로 해경정도 움직일 수가 없어, 취재진 강제 철수는 결국 무산됐다. 대연평도에는 아직 주민과 기자, 군과 경찰들이 남아있다.

 이상만 기자 diplina@dankook.ac.kr


해군의 148톤 급 고속함 333호가 포성이 울린 11시 20분부터 연평도 섬을 돌며 정찰하고 있다.


 

 

■ 서해5도 주민들의 피난처

  삶의 터전 잃고 찜질방에 전전
“그래도 연평도 가서 살고 싶어…”

포격 후 엿새째인 28일, 연평도 주민들은 최근 삶의 터전을 잃고 꼼짝없이 인천시 중구 신흥동 모 찜질방 임시 숙소에서 지내고 있다. 약 1000여명의 주민들은 소일거리 없이 삼삼오오 모여 얘기를 하거나 누워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보통 찜질방에서 입는 시원한 옷차림과는 달리 주민들은 두꺼운 윗옷을 꽁꽁 싸매 입고, 챙겨온 짐도 다 풀지 않은 채 언제든지 떠날 채비를 한 듯 보였다.

이렇게 임시 숙소에서도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없는 연평도 주민들을 위해 여러 곳에서 자원봉사를 나온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또한 연평도의 아이들이 걱정돼 살펴보러온 연평초등학교 모 교사를 만날 수 있었다. “살아서 나올 수 있게 된 게 감사하다. 아이들도 모두 다친 데가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큰 학교가 아닌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다”며 “방공호가 학교 밑에 바로 있어서 대피하는데 신속하게 할 수 있었다”고 그 당시 상황을 생각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찜질방에서 아이들은 찜질방 내부 PC방과 만화책방 그리고 놀이방에서 천진난만하게 친구들과 어울려 놀곤 했다. 지금 연평도의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생각보다 아이들은 해맑았다. 하지만 모든 아이들이 밝은 표정을 지닌 것만은 아니었다. 박병환(14세) 군은 “수업을 하려는데 갑자기 빵! 빵! 소리가 들리더니 밖에서 연기가 나고 불이 났다. 잠깐 잠잠해지는가 싶더니 또 폭격이 일어났다. 정말 무서웠고 놀랐다.”고 말했다. 또 “아빠가 군인이라 연평도에 남아있는데 정말 걱정이 많이 된다”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몇 분 뒤 텔레비전에서는 ‘주민 긴급 대피령’이라는 속보가 떴다. 주민들은 일제히 텔레비전을 보고 있고, 얼굴들은 하나같이 복잡한 심정을 대변하듯 어두웠다. 한참동안 텔레비전을 바라보더니 눈물을 글썽이는 한 아주머니를 볼 수 있었다. “아들이 공무원이라 연평도를 지키고 있다”며 “오늘 미사시간에도 아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울었다”고 말하는 아주머니의 눈물을 알 수 있었다. 또 “연평도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옹진군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점심시간이 되었다. 찜질방 내 식당에서 식사를 할 수 있기 때문에 기다리는 줄이 계속 이어진다. 식사를 마친 박 할아버지(73세)는 “밥이 별로지만 죽지 못해 먹어”라며 “잘 때도 쭈그리고 자는데 여기서 생활하다 없는 병도 생기겠어”라고 생활의 불편함을 호소한다. 이어서 구구절절 사연을 들을 수 있었다. “칠 십 평생 살면서 6·25도 겪었었는데 그때도 연평도는 잠잠했어. 근데 이거는 날벼락인거야. 지금도 생각하면 심장이 벌렁벌렁해. 고향을 잃은 심정이야.”

연평도 남부리에서 온 박명선 할머니는 “오늘 진료 받았는데 낼 큰 병원 가보래. 따뜻한 곳에서 편하게 쉬어야 하는데 지금 그러지 못 하니께. 편안하게 쉬고 싶은데 말을 하기가 힘들어….” 라며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더 말을 못해 미안하다고 했다. 아니, 기자가 더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마침 주변을 살펴보니 발에 깁스를 한 젊은 여성, 목에 파스를 붙인 아주머니, 허리에 보호대를 한 할머니 등 겉으로 보기에도 박 할머니처럼 치료가 필요해 보이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반면 아이들은 여전히 아픔을 모른 채 해맑았다. ‘찜질방 난민’들을 취재하러 온 외신기자의 카메라를 보고 ‘Hi’라 외치더니 방긋 웃고 뛰어가는 한 아이를 보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훗날 저 아이들은 지금처럼 삶의 터전을 잃는 아픔을 더 이상 몰랐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박윤조 기자 shynjo03@dankook.ac.kr


▲대피소에 설치된 임시진료소의 모습.
▲인천의 인스파월드에 마련된 대피소에 모여있는 연평도 주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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