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惟政)의 『분충서난록』
유정(惟政)의 『분충서난록』
  • 김철웅 연구원
  • 승인 2010.12.01 08:17
  • 호수 1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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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는 보배가 없고 다만 가토의 머리를 보배로 여긴다

  

▲ 나라에 큰 일이 생길 때마다 땀을 흘린다는 표충사의 사명대사비.
지난 11월 14일에 한국과 일본 정부는 문화재 반환 협정에 서명했다. 일본이 반환하기로 한 도서는 150종 1205책에 달하는데, 이 중에는 『분충서난록(奮忠難錄)』이 포함되어 있다. 이 책의 제목은 “충성심을 떨쳐 전란을 물리친 기록”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충성심으로 떨쳐 일어난 이는 사명대사로 알려져 있는 유정(1544~ 1610)이고, 전란이란 바로 임진왜란을 말한다. 유정은 스승인 서산대사와 함께 승군을 이끌고 왜적을 물리친 승장(僧將)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것은 유정이 49세가 되는 해(1592년)였다. 이때 그는 금강산 유점사에 있었는데, 왜군이 쳐들어오자 유정은 가부좌하고 앉아서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으니 왜병이 기이하게 여기고 물러갔다고 한다. 이어 불교의 설법으로 왜장을 탄복케 하여 인근 아홉 고을의 백성들을 구출하였다. 이때 유정은 서산대사의 격문을 받고 승병을 모아 합류하였다. 이후 유정은 승병 2,000명을 이끌고 평양성 탈환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 뒤 세 차례에 걸쳐 적진에 들어가서 적장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회담을 가졌다. 그리고 1604년 8월에는 선조의 명을 받고 일본으로 건너가 왜란 때 잡혀간 3,000여 명의 백성을 데리고 귀국하였다. 이러한 유정의 활약상에 대한 기록을 모아 정리한 것이 바로 『분충서난록』이다. 우리 대학에는 1739년에 밀양 표충사에서 간행한 목판본이 소장되어 있다.

   『분충서난록』은 유정의 5세 제자인 남붕(南鵬) 스님이 모은 유정의 유고(遺稿)가 모태가 되었다. 김재로(1682~1759)의 서문에 의하면, 내용에 맞게 ‘분충서난록’이란 제목을 부치고, 당대에 명문장가로 알려진 신유한에게 부탁하여 유정과 관련된 여러 내용을 보충하여 덧붙이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분충서난록』이 완성되었는데 그 내용을 보면 먼저 김재로와 어유구의 서문이 있고, 그 다음에 유정의 활약상을 보여주는 본문이 있다. 이 내용은 사명대사가 직접 쓴 것으로 그의 활약상이 잘 나타나 있다. 즉 선조 27년(1594) 4월과 7월, 12월에 가토 기요마사의 진영에 들어가 담판한 내용과 적정의 허실을 상세히 기록한 「청정영중탐정기(淸正營中探情記)」 3편이 있고, 중국 사신에게 자신이 알아낸 적진 정보를 술회한 글이 기록되어 있다. 이어 2편의 상소문이 있다. 유정은 1594년과 1595년에 선조에게 상소를 올려 전쟁 중이라도 백성 보호에 힘써야 함을 역설했다. 그리고 국난 극복의 방안으로 인물 본위로 인재를 선발하고 비록 천한 자라도 역량이 있으면 뽑아 쓸 것, 산성을 수축하고 군량과 무기를 비축할 것, 장수를 신중히 임명할 것 등을 선조에게 간언하였다. 상소문에 이어 일본 승려에게 보낸 편지글이 실려 있다. 그 다음으로는 신유한이 유정과 관련된 기록을 발췌하여 실었는데 이수광의 『지봉유설』, 유몽인의 『우야담』, 홍만종의 『순오지』 등에 실린 것을 첨부하였다. 그리고 책 말미에는 신유한의 발문이 있다.

   한편 김재로는 서문에서 유정에 대해, “불교에서는 임금과 어버이를 버리고 세상 밖의 예(禮)를 숭상하니 유가(儒家)에서 매우 싫어하고 힘써 배격한다. 그러나 스님은 한낱 승려로서 무리를 이끌고 적을 토벌하였으며, 임금의 뜻을 받들어 적진에 들어가 그 허실을 남김없이 알아내었다. 또한 전란이 겨우 진정되자 임금의 명을 받들어 교만한 오랑캐를 제압하고 나라를 평안케 하였으니, 그 충성과 공로가 어찌 심히 위대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하며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이어서, “귀국에는 어떤 보배가 있느냐는 가토(加藤淸正)의 물음에 스님은, ‘우리나라에는 보배가 없고 다만 장군(가토)의 머리를 보배로 여긴다’고 대답하였으니, 가토로 하여금 머리 숙여 공경하고 탄복하면서 마침내 감히 칼을 빼지 못하게 하였다”고 하여 적진에 들어가서도 기개 넘친 유정의 모습을 칭송하였다. 유정이 보여준 외교 담판의 담대함, 적 정세의 간파, 예방적 국방 강화 등은 오늘날에도 매우 유효한 전란 대비책이라고 할 것이다.  

김철웅(동양학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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