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정덕선의 『충렬실록』
(22)정덕선의 『충렬실록』
  • 김철웅 연구원
  • 승인 2011.02.03 13:31
  • 호수 129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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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서는 의로운 장수였고 죽어서는 충신이 되었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 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로 시작하는 변영로의 시 「논개」는 임진왜란 때의 진주성 전투를 배경으로 한 것이다. 남강을 옆에 낀 험준한 형세에 높은 석벽을 쌓아 올린 진주성은 전라도 방어의 요충지였다. 원래 토성이었던 진주성을 고려말에 석성으로 개축한 것도 왜구의 침범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왜구 방어 기지였던 진주성은 개축한 지 2백 년 만에 임진왜란의 격전지가 되었다. 경상도를 손에 넣은 왜군은 조선 남부를 장악하기 위해 전라도의 길목에 놓인 진주성을 공격하였다.

1592년 10월 4일, 왜군은 2만의 군사를 이끌고 진주성을 포위하였다. 진주성에는 진주목사 김시민이 이끄는 4천여 명의 병력이 백성들과 함께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진주성을 쉴 새 없이 공격하던 왜군은 결사 항전하는 조선 군민(軍民)을 이기지 못하고 절반에 달하는 병력을 잃고 퇴각하였다. 전라도를 장악하고 신속하게 전쟁을 마무리 하려던 일본의 전략은 어긋나고 말았다. 이에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진주성은 꼭 함락시키라는 명령을 다시 내렸다. 그리하여 2차 진주성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2차 전투는 이듬해 6월 22일부터 29일까지 벌어졌다. 왜군은 흙을 쌓아 언덕을 만든 후 성 안으로 사격을 퍼부었고 방책을 만들어 화살을 막으면서 맹렬히 공격하였다. 그리고 철갑을 입힌 수레를 끌고 와 철추로 성문을 뚫으려 했다. 이에 조선 군민은 화살과 횃불, 죽창 등 온갖 무기를 동원하여 격렬하게 대항하였다. 그러나 29일 오후, 폭우로 인해 동문이 무너지자 왜군이 밀려 들어왔다. 결국 조선 군민은 왜군에 밀려 남강 가에 자리 잡은 촉석루로 몰리게 되었다. 김천일은 촉석루에서 항전을 계속하다가 남강에 몸을 던져 목숨을 다하였다. 최경회와 여러 장군도 더 이상 대적할 수 없게 되자 항복을 거부하고 남강에 투신하여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이리하여 진주성은 함락되고 창의사 김천일, 충청병사 황진, 경상우병사 최경회, 의병장 고종후·민여운 등이 남강에 투신하거나 전사하였다. 성을 함락시킨 왜군도 병력 손실이 커 진주성을 포기하고 퇴각하였다. 우리 대학이 소장하고 있는 『충렬실록』은 바로 진주성 1·2차 전투를 기록한 것이다.

▲ 수려한 경치와 전쟁의 비극이 공존하는 촉석루.

『충렬실록』의 서문은 1831년에, 발문은 1834년에 작성되었다. 따라서 『충렬실록』이 완성된 것은 1834년이니 진주성 전투에 대한 모든 것을 정리한 것이다. 이 책에는 1·2차 진주성 전투의 상황을 여러 문헌을 참고하여 상세히 기록하고, 아울러 전투에 참여한 여러 사람들에 대한 포상과 추모의 내용을 기록하였다. 즉 김시민, 김천익, 최경회, 황진, 장윤 등 31명을 추모하기 위해 충민사와 창렬사를 건립한 경위와 이들에 대한 제문(祭文)을 서술하였다. 왜란에서 여러 차례 공을 세웠던 김천익은 결국 촉석루에서 최후를 맞이했는데, 사람들은 “살아서는 의로운 장수가 되었고 죽어서는 충신이 되었다”고 그를 애도하였다. 『충렬실록』에는 최경회의 최후도 묘사되어 있다. 「득인비명(得印碑銘)」에 따르면 “왜란이 끝난 후  관노 귀동이 남강 가에서 인장을 하나 주었는데, 거기에는 ‘경상우도병마절도사인’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그런데 인장 한쪽에 ‘만력 10년 조(造)’라는 글귀가 있어 이것이 진주성이 함락당할 때 최경회가 안고 강에 뛰어들었던 인장으로 판명되었다. 이에 그 내력을 비명에 적어 최경회의 기상을 치하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의암사적비명」에서는 논개의 의로운 죽음을 기록하였다. 1662년 최진한이 논개를 포상해야 한다고 비변사에 건의하였고, 이에 비변사에서, “관기 논개가 왜적을 안고 물에 빠져 순국함으로써 의암이란 칭호가 지금까지 전해내려 왔다니, 관기 중에서 이러한 기절이 있는 것은 매우 가상하다”고 하여 의암사적비를 건립하였다고 한다. 이리하여 논개는 국가에 의해 순절이 공인되어 ‘의기(義妓)’가 되었다. 한편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진주성에서 죽어간 수 많은 이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제동순군졸문(祭同殉軍卒文)」이 있어 전쟁의 참상을 전해주고 있다. 


 김철웅(동양학연구소) 연구원

김철웅 연구원
김철웅 연구원

 dkdd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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