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삼환의 『성호선생언행록(星湖先生言行錄)』
이삼환의 『성호선생언행록(星湖先生言行錄)』
  • 김철웅(동양학연구소) 연구원
  • 승인 2011.03.11 08:53
  • 호수 129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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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독(精讀)을 통해 깊은 뜻을 스스로 깨달아야 지식이 자기의 것이 된다

 

(23) 이삼환의 『성호선생언행록(星湖先生言行錄)』

 

▲경기도 안산시에 있는 성호 이익의 기념관.



  성호 이익(1681~1761)은 18세기 조선을 대표하는 재야 실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의 여주 이씨 가문은 대대로 고위직을 배출한 명문가였다. 성호의 증조부는 의정부 좌찬성을, 할아버지는 사헌부 지평을 지냈으며, 아버지는 대사헌을 역임했다. 그러나 아버지 이하진이 당쟁에 휘말려 평안도 운산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이해에 성호는 유배지에서 9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해에 아버지는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태어날 때부터 병약했던 성호는 10살이 되어서야 둘째 형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의 불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25살 때에 본 과거에서 낙방하였고, 이듬해에는 둘째 형이 세자의 생모인 장희빈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역적으로 몰려 모진 형벌을 받고 죽고 말았다. 성호는 가장 친애하던 형이자 존경하는 스승이 죽자 더 이상 관직 진출에 뜻을 두지 않고 안산 첨성리에서 은둔하며 재야의 선비로 평생을 보냈다.


  당시 조선이 직면해 있었던 정치, 경제, 사회 등의 여러 문제를 깊이 있게 성찰하였던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 『곽우록』 등의 저서를 통해 혁신적인 해결 방안을 제시하였다. 그는  당대의 부정한 현실을 예리하게 지적한 학자이자 치열한 문제 의식을 가진 개혁 사상가였다. 이러한 성호의 참모습을 전해주는 『성호선생언행록』이 유일하게 우리 대학에 소장되어 있다. 책의 말미에 “목재공(木齋公) 찬(撰) 계해(癸亥)”라는 기록이 있다. 이 내용에 따른다면 이 책은 목재 이삼환(1729~1813)이 계해년인 1803년에 편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삼환은 성호의 종손으로 12살 무렵부터 약 20년 간 성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따라서 이 책은 이삼환이 직접 보고 들은 성호의 언행을 서술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성호선생언행록』은 모두 34장에 걸쳐 성호의 학문과 행실을 기록하였다. 성호는 학문하는 자세에 대해, “높은 경지를 향해 착실히 공부하고 거듭거듭 힘써야 한다. 뜻을 세움이 견고하지 못하면 명예와 이익에 뜻을 빼앗기기도 하고 혹은 가난 때문에 절개를 바꾸기도 한다”고 하여 부단히 노력하고 의지를 굳게 하여 속세에 흔들리지 말고 진지하게 학문 탐구에 매진할 것을 강조했다. 그리고 독서와 사색의 방법에 대해서는, “독서함에 많은 책을 읽는데 힘쓸 필요가 없고 다만 정독(精讀)해야 한다. 정독을 통해 깊은 뜻을 스스로 깨달아야 지식이 자기의 것이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성리학의 이·기(理氣) 논쟁에 대해, “기대승의 분석이 너무 지나치고 퇴계와 많은 학설을 주고 받아 우리나라 학자들의 최대 현안이 되어 버렸다. 모름지기 한가한 이야기는 그만 두고 집안과 나라에 쓸모 있는 학문에 힘써야 한다”고 하여 학문의 실용적 가치를 강조하였다. 한편, 성호는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의 뜻을 어긴 적이 없었으며, 부친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평생의 가장 애통한 일로 여겼다. 그리고 형제 간의 우애도 두터웠는데, 특히 둘째 형에 대한 애정이 지극하였다. 성호는 자신의 회갑날에 둘째 형의 무덤에 가서 오랫동안 울어 눈물에 젖은 옷이 얼어붙어도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성호는 평민과 노비 등의 하층민을 양반과 같은 인격체로 대우하였다. 성호는, “비록 천한 종이라도 머리털이 흰 사람에게는 함부로 이름을 부르지 않고 반드시 그 자식의 이름을 붙여 ‘누구 아비’, ‘누구 어미’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이 부리던 종을 위해 제문을 짓고 무덤에 가서 제사를 지낸 준 일도 있었다. 이러한 그의 행실은 노비에 대한 개방적인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성호는 “우리 조선의 풍속은 신분을 차별하여 노비는 백 대가 지나도 영달하지 못하고, 재상가의 어리석은 자는 모두 등용되니 애석한 일이다”, “노비를 대대로 전하는 것은 천하고금에 없는 일이다”고 하여 노비 제도를 비판하였다. 이러한 성호의 모습은 권력 다툼에 몰두하던 위정자와 허세만 부리던 유학자들이 입으로만 부르짖던 ‘친민(親民)’이 아닌, 진정한 ‘친민(親民)’의 실천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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