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오도답파여행]① 철도와 신작로를 따라 문명의 시대를 꿈꾸다
[신오도답파여행]① 철도와 신작로를 따라 문명의 시대를 꿈꾸다
  • 김재관(동양학연구소) 연구교수
  • 승인 2011.03.15 15:05
  • 호수 129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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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백년 전 이광수가 걸었던 길

① 철도와 신작로를 따라 문명의 시대를 꿈꾸다
 

  <기획을 시작하며> 

  이광수는 매일신보사의 의뢰를 받아 충남, 전북, 전남, 경남, 경북 등의 오도를 답파하는 여행을 떠난다. 그는 1917년 6월 26일 오전 8시 30분 남대문역을 출발하여 경주 불국사까지 54일 동안 다섯 개 도의 주요 도시를 돌아본다. 조선총독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그는 여행의 기록을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매일신보』에 53회에 걸쳐 기행문으로 연재한다. 조선총독부가 그의 여행에 행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은 이유는 조선총독부의 식민정책을 홍보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총독부는 식민지배 7년 동안 조선의 발전을 위해 근대제도를 도입했고, 조선의 문명 발전에 매진하고 있음을 알리고자 했다. 이를 위해 기관지였던 경성일보와 매일신보의 지면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이런 조선총독부의 시정(施政) 현황과 성과 등을 알리기 위해 매일신보사가 취한 방식은 특이했다. 조선인이 조선의 각 지역을 시찰하고 기록하는 방식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1910년부터 각종 논설과 소설에서 조선의 문명화를 설파하여 조선 청년의 지지를 받고 있었고, 장편소설 ‘무정’으로 문학적 능력을 입증한 이광수가 이 기획의 적임자로 선정된다. 그는 「오도답파여행」의 연재를 통해 조선총독부의 기획의도를 충실하게 이행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문명화 방향을 제시하고, 피폐한 조선인의 삶을 기록한다. 특히 「오도답파여행」에는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담론들이 적지 않게 제시되고 있다. 아직도 이들 담론은 ‘식민’과 ‘탈 식민’의 경계에 놓여 있다.
  따라서 이광수의 글이 연재된 지 백여 년이 지난 현시점에서 「오도답파여행」에 서술된 식민지 조선의 모습과 현재의 우리 사회를 비교하는 시도는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이를 통해 우리가 성취한 근대문명의 연원(淵源)을 밝히고, 결실의 의미를 반추해 보고자 ‘신오도답파여행’을 연재한다. 



  와세다 대학 철학과에 재학 중이던 이광수에게 한 통의 편지가 왔다. 보낸 이는 매일신보사의 감사였던 나카무라 겐타로(中村健太郞)였다. 매일신보사는 이광수에게 여름방학 기간 중에 조선총독부가 새롭게 펼치는 조선의 정책을 시찰하고, 이를 『매일신보』와 『경성일보』에 연재하자고 제안한다. 매일신보사의 연재 의뢰는 마침 조선의 현실을 직접 보고 싶었던 그의 흥미를 자극했다. 연재를 수락한 그는 1917년 6월 26일 오전 8시 30분 남대문 역에서 경부선 남행열차를 타면서 오도를 답파하는 장도에 오른다.


  근대 이후 철도가 놓이면서 ‘사람의 왕래가 길을 만들던 시대’는 끝났다. 철도는 ‘길이 있어서 사람이 왕래하는 시대’를 열었다. 이제 길의 중심은 철도였고, 철도역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도로가 퍼져 나갔다. 한반도에서도 1905년 1월 1일 경부선이 개통되면서 전대와 다른 방식의 교통로가 만들어진다. 일제는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난공사 구간에 임시 철로를 부설하는 편법으로 ‘초량~영등포’를 잇는 경부선을 개통시킨다. 1906년에는 ‘용산~신의주’ 구간을 잇는 경의선이 경부선과 연결되면서 한반도를 종단하는 철도망의 한 축이 만들어진다. 또한 ‘대전~목포’ 구간의 호남선과 ‘용산~원산’ 구간의 경원선이 1914년 개통되면서 한반도를 ‘X자형’으로 연결하는 간선철도망이 완성된다. 이에 따라 수운(水運)과 도보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여행 방식은 철도가 근간이 되는 방식으로 재편된다.


  이광수의 「오도답파여행」에도 새롭게 형성되는 여행 방식의 변화 과정이 나타나며, 이용하는 교통수단에 따라 사물과 대상을 평가하는 내용도 달라진다. 그의 첫 도착지는 경부선이 지나가는 ‘조치원(鳥致院)’이다. 그는 ‘조치원역’에 내렸지만 여정의 첫 시작지인 ‘공주(公州)’로 바로 간다.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이런 여행 방식은 도보 중심의 여행 방식에서는 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조치원’과 ‘공주’를 운행하는 승합자동차에 탄다. 기차역과 연계 운행하는 승합자동차를 이용하는 모습은 이후의 여정에서도 등장한다. 승합자동차는 이 시기 철도가 부설되지 않은 지역을 연결하는 지선 교통수단 중의 하나였다. 충남의 대표적인 친일파였던 공주 갑부 김갑순(金甲淳)은 「오도답파여행」에 기술된 ‘공주-조치원-청주’ 구간에 정기적인 승합자동차 노선을 경영할 정도로 이재에 밝은 인물이었다. 그는 이 노선 이외에도 ‘공주’와 ‘논산’을 잇는 노선에서도 승합자동차를 운행했다. 두 노선은 경부선, 호남선의 주요역과 ‘공주’를 연결한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이광수도 이런 연계 교통수단을 이용하여 충청남도 도청이 있는 ‘공주’로 간다. ‘공주’는 조선 시대 충청감영이 있었던 유서 깊은 도시였다. 그러나 경부선이 ‘대전’과 ‘조치원’을 잇는 선으로 부설되고, 호남선마저 ‘대전’과 ‘논산’을 잇는 선으로 부설되면서 ‘공주’는 근대교통망의 중심축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후 1932년 ‘공주’에 있던 도청도 ‘대전’으로 이전하면서 근대화의 수혜를 받지 못한 이 도시는 철도선에 있는 도시와 엇갈리는 행로를 걷게 된다. 또한 근대 문명을 상징하는 철도와 신작로가 비껴가면서 공주를 경유하는 금강(錦江)의 수운도 쇠퇴한다. ‘조치원’에서 ‘공주’까지 놓인 신작로(新作路)에서 이광수가 느끼는 경쾌함도 이러한 상황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만약 ‘공주’까지 운행하는 승합자동차가 없었다면, 그는 경부선이 지나가는 ‘부강(芙江)’에서 금강 수운을 이용했어야 했다. ‘부강역’이 있는 충청북도 청원군 부용면에서 배를 이용했다면 ‘육도답파여행’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부강’은 경부선이 개통되기 이전까지 금강 내륙수운이 시작되는 주요 나루였다. ‘부강~공주’ 구간은 수량과 풍향에 따라 6~10시간 정도 걸렸다고 한다. 조치원과 공주를 잇는 신작로가 개통되고, 호남선과 충북선(1921년)이 개통되면서 ‘부강’에서 시작되는 수운도 쇠락한다. 이제 봉건 조선이 식민지로 전락했듯이 조선의 대동맥이었던 수운도 식민지 교통망인 철도와 신작로에 의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 KTX 개통 이후 물류의 중심으로 부상하는 조치원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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