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묵처방

2003-11-05     이태훈


이태훈
<전 인문과학대학 어문학부 중국어전공>

외국어를 위한 ''''20번 읽기''''의 비밀

요즘 대학생들은 어학연수를 다녀오지 못하면 축에 끼지를 못한다고 한다. 외국어를 잘 배우기 위해서는 어학연수가 유일무이한 철칙으로 알고 있는 듯 하다. 물론 어학연수가 외국어를 학습하는 가장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임엔 틀림이 없다. 현지에 가서 직접 문물을 접하면서 체험을 통해 산 언어와 지식을 습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구나 다 어학연수만 다녀오면 저절로 그 나라 말에 능통할 수 있는 것일까? 이제 마음을 진정하고 꼼꼼히 따져보아야 할 것이 있다.
우선 그 많은 돈과 시간과 노력을 들이고 얻을 수 있는 소득이 얼마나 될까 이다. 중국의 경우 대부분의 대학이 이른바 ‘한어교학중심’이란 판을 벌리고 세계 각 국에서 고객을 불러들여 짭짤한 재미를 보고 있다. 그런데 그 고객의 절대 다수가 우리 한국 학생들이다. 대학생은 물론이고 중.고생 심지어 초등학생까지도 앞을 다투어 1년에 수 천명씩 떼지어 가 충실한 고객이 되어 학비 생활비 교통 잡비 등 엄청난 돈을 쏟아 붇고 있다. 그러면서 배워 얻는 것은 무엇이고 얼마나 될까? 주 5일, 1일 오전 4교시 수업, 주말 참관활동(추가 부담)이 전부이다. 물론 열심히 하는 학생도 있지만, 과거 수차 연수팀을 인솔한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대부분의 학생들은 날이 지날수록 나태해져 수업에도 불충하고, 친구들끼리 삼삼오오 짝을 지어 먹고 마시고 담소하고 거리를 활보하는 것이 마치 한국의 어느 대학가에 온 것이 아닌가 착각하게 한다. 중국어를 한 마디 못해도 생활에 아무런 불편이 없다. 이런 환경에서 강철같은 의지가 없는 한 소기의 목적을 이루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학생들이 상담하러 올 때마다 나는 얼마나 못 가르쳤으면 어학연수를 가려고 하는가 하고 자괴감에 빠지곤 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가르치는 선생도 책임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사실은 학생 스스로가 열심히 하는 외에는 달리 왕도가 없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 학생들이 노력은 하지 않고 쉽게만 공부하려한다고 혹평한다면 편견이고 그릇 판단한 것일까? 나의 대학시절인 50년대 말을 회상해본다. 외국어 공부에 필수인 시청각 기자재는 말할 것도 없고 전공교재 조차 구하기 힘든 시절이었다. 벌써 작고하셨지만 수업에 아주 엄한 교수님이 한 분 계셨다. 적당한 교재를 구할 수 없어 교수님 당신이 갖고계신 교재 내용을 필치 좋은 동학을 시켜 칠판에 판서케 했고, 다음 수업시간에 그것을 교단 앞에 나와 암기하도록 하셨다. 암기를 못하면 학점을 인정하지 않으셨다. 이 때문에 우리는 매일 같이 타과생 보다 일찍 등교하여 중얼중얼 암기하기를 2년여를 계속했다. 이로써 기초를 정확하고 단단하게 다질 수 있었다. 나도 선생님의 교수법을 답습하여 과거 20여년 동안 학생들을 연구실로 불러 암기를 시켜 원성을 사기도 했다.
암기 당시의 괴로웠던 추억을 아름답게 간직하고 고마워 졸업생들을 대할 때마다 자긍심을 갖게된다. 외국어 공부에는 달리 뾰죽한 수가 없다. 학생들은 끊임 없이 읽고 쓰고 암기하고, 선생님은 이를 독려하고 점검하고 바로 잡아주고 하는 정성이 서로 어울릴 때 효과는 배가될 것이다. 그 위에 학교 당국은 시청각 시설 등 입체적으로 학습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주고 부족한 것을 계속 보충해 줄 때 상승 효과가 나타날 것이다. 지금처럼 있는 기기마저도 잠금쇄로 잠가 놓고 무슨 신주 모시듯 담당 선생님 감시 하에서 수업시간에만 사용하고 있으니 어찌 그 효험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여하간 지금 학생들은 복에 겨워 오히려 그 복을 감지하지 못하는 것 같다. 최 정예 전문가들이 수 없는 검증을 거쳐 만든 이상적인 교재가 넘쳐나고 날로 첨예화하는 시청각 기기를 손쉽게 활용할 수 있는 이 좋은 환경에서 공부를 못한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공부를 포기했거나 아니면 아무 노력도 없이 멍청하게 먼 산만 바라보고 있으면 모를까 신념을 갖고 매일 같이 두 손을 꼭 쥐고 정진할 때 어떠한 외국어도 제군의 것이 될 것이다.
이제 다시 외국어를 정복할 수 있는 비결을 알려드리려고 한다. 극히 간단하다. 지금 공부하는 교재를 20번씩 읽으면 그만이다. 학부제 실시 후 학생들의 암기를 기대할 수 없게 되어 20번 읽기 운동을 전개해 보았다. 이를 충실하게 실행한 동학들은 확실히 좋은 성과를 보여주고 있었다. 아무리 시원한 물이라도 자신이 직접 마셔보지 않는 한 그 시원함은 어떠한 형용사로도 설명해 이해시킬 수가 없다. 제군들이 직접 마셔보고 그 시원함을 누리기를 간구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