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 보장과 범죄에 대한 불안 사이

성 중립 화장실

2019-10-22     강혜주 기자

[View 1] 트렌스젠더 A

하루의 반나절 이상을 학교에서 보내지만 나는 한번도 학교 화장실에 가 본 적이 없다. 오늘도 볼일이 너무 급했지만, 막상 화장실 팻말 앞에 서니 어디로 들어가야 할지 고민돼 어느 곳도 갈 수 없었다. 나는 왜 생물학적 성과 다른 성 정체성을 가져서 생리현상에도 눈치를 봐야 하는지, 괜한 억울함과 원망이 차오른다. 공공 화장실 이용이 꺼려지니 자연스레 장시간 외출도 부담스러워졌다.

내가 성에 대해 자각한 순간부터 나는 남들과 다르단 걸 깨달았다. 어릴 때는 내가 잘못된 것이라 생각하며 바꿔보려는 노력도 많이 했지만, 성 정체성은 노력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만 얻었다. 성전환 수술도 고려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금액적 부담과 호르몬에 의한 부작용 등이 걱정돼 쉽사리 결정할 수 없는 상황이다.

2010년 미국에서는 성 소수자를 혐오하는 한 학생이 교내 화장실에서 트렌스젠더 학생을 폭행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당시 대통령이었던 버락 오바마는 백악관에 성 중립 화장실을 설치했고, 성 중립 화장실 설치 의무화 조항을 만든 주도 있다. 우리나라도 성 소수자 혐오로 인한 범죄가 실제로 발생해야만 그에 대처하는 방안을 내놓을까. 내가 바라는 건 거창한 도움이 아니다. 생리현상과 같은 최소한의 기본 권리라도 보장 받을 수 있길 바랄 뿐이다. 성 중립 화장실 설치는 성 소수자의 인권을 개선하는 한 걸음이 될 것이다.

 

[View 2] ‘강남역 살인사건시위 참여자 B

대검찰청에 따르면 불법 촬영에 대한 유죄 판결이 2005년 이후로 계속 증가해 2015년에는 약 8천건이 적발됐다. 평균적으로 매일 21명이 불법 촬영으로 처벌을 받는다는 것인데, 잡히지 않은 용의자들까지 합하면 사회에 얼마나 많은 몰래카메라 범죄자가 있는 건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다. 몰래카메라 범죄는 계단, 지하철 등에서 빈번하게 발생하지만 가장 두려운 곳은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 공공 화장실이다.

성 중립 화장실은 성별과 관계없이 모두에게 접근성이 높다. 이로 인해 화장실 내부에 몰래카메라를 설치하는 것도 손쉬워질 테니 우려의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몰래카메라의 피해자는 너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가 될 수 있다. 반면 이에 대한 처벌은 단순히 벌금형으로 끝나는 경우가 빈번하기 때문에 법만 믿고 있을 수는 없다. 소수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해결책이 다수의 인권을 해치는 길이 될 수 있다면 다른 해결 방안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강남역 살인사건이 발생한 게 불과 3년 전이다. 해당 사건이 크게 다뤄진 이유 중 하나는 피의자가 공공 화장실에서 여성이 올 때까지 1시간 이상을 기다렸다는 점에 있다. 이 사건의 여파가 아직 가시지 않았고,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날까 두려워 공공 화장실 이용도 꺼리는 이들이 만연한 상황에 성 중립 화장실이라니. 특정 성별을 대상으로 범죄가 행해지는 판국에 성 중립 화장실은 시기상조다. 아직 불법 촬영에 대한 걱정과 성범죄 발생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사라지지 않은 만큼 성 중립 화장실은 설치 이전에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실제 사례를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Report]

성 중립 화장실이란 성별과 관계없이 모두 사용할 수 있는 공공 화장실을 말한다. 내년 1월부터 미국 일리노이주에서는 모든 공공 화장실이 성 중립 화장실로 바뀔 예정이다. 이는 성 정체성이 생물학적 성과는 다른 이들을 존중한 처사이다. 우리나라에서는 2017년에 현대카드가 사내에 성 중립 화장실을 만들며 화제가 됐다.

성 중립 화장실은 비단 성 소수자들만을 위한 대안이 아니다. 보호자와 동행한 어린 피보호자의 성별이 다를 경우, 혹은 장애인과 보조인의 성별이 다른 경우에도 활용될 수 있다. 이외에도 이점은 더 있다. 벨기에 겐트 대학교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여자 화장실의 대기시간은 항상 남자 화장실보다 1.5~2배 정도 더 길다고 한다. 이 경우 성 중립 화장실을 보편화한다면 대기 줄에 남녀구분이 사라지니 이러한 시설적 문제가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한편, 지난 10년간 우리나라에서 카메라를 이용한 성범죄는 8배 이상 증가했다. 자연스레 국민들의 몰래카메라 범죄에 대한 우려도 커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나사 모양의 몰래카메라도 나올 정도로 점점 치밀해지고 있으니 도입 이전에 성범죄 예방에 대한 확실한 해결책 논의가 선행돼야 할 것이다.

여러 선진국에서 성 중립 화장실이 이미 시행 중이지만 우리나라와는 정서상 맞지 않아 갈등이 유발될 수 있다. 아직까지 기성세대의 의식에는 남녀유별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 중립 화장실이 상용화되기 위해서는 정부 차원에서 이를 뒷받침할 제도를 정립해야 할 뿐만 아니라, 시민들의 인식 개선도 필요하다. 올바른 시민의식과 정당한 제도가 뒷받침되지 않는 한, 이러한 시설의 도입은 논란만 가중할 뿐이다. 차별과 불안 없는 사회를 동시에 만들기 위해서는 단계적인 계획 수립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