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수의 법칙
“니들이 많을 것 같냐, 우리가 많을 것 같냐? 나쁜 놈은 백 중에 하나 나오는 쭉정이지만 착한 놈들은 끝이 없이 백업이 디야. 우리는 떼샷이여.”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서 경찰인 주인공이 연쇄살인범 까불이에게 던지는 대사다. 나쁜 사람들이 기를 쓰고 날뛰어 봤자 착한 사람이 주류인 세상에선 맥없이 쓰러지고 만다는 쪽수의 법칙. 기자는 이 쪽수의 법칙을 믿는다.
이 드라마 속 인물들은 애먼 기적을 바라지 않는다. 대신 작은 호의와 착한 사람들의 선의, 게임 ‘슈퍼 마리오’ 속 동전처럼 조금씩 모은 마음들이 기적이란 모양의 ‘따뜻함’을 만든다고 말한다. 기자가 찾은 본지 12면 속 현장도 마찬가지였다. ‘아름다운 가게’를 여는 봉사자들의 활기찬 인사도, 저금통째 들고 와 기부했다던 5살 남자아이의 예쁜 마음도, 어릴 적 받았던 사랑을 되돌려주려 매장개설 기금을 기부한 보육원 퇴소 청소년 출신 박사도 누구 하나 대가를 바라는 이가 없었다. 하늘에서 떨어질 어느 날의 기적을 욕심내지 않았고 자신이 줄 수 있는 만큼만 내어준 것뿐인데 신기하게도 이 마음들은 한데 모여 세상을 굴리는 동력이 됐다.
기부는 ‘Give And Take’의 Give가 아니다. 기부에서 주는 만큼 돌아오는 것은 오직 자그마한 퍼즐 조각뿐이다. 하지만 내 손에선 작아 보였던 이 조각은 선한 사람들의 손을 거치다 보면 점점 불어나 세상을 숨 쉬게 하고, 약자들을 웃게 하며, 아이들을 꿈꾸게 한다. 그리고 그 힘은 매우 강력해 퍼즐 중 일부가 사라지더라도 ‘나눔과 행복’이라는 큰 그림은 일그러지지 않는다. 기부란 그런 것이다.
기자는 최근 사회면을 뜨겁게 달군 일련의 사건들로 세상을 향한 분노에 가득 찼었다. 하지만 기부 현장 취재를 통해, 가장 낮은 곳에서 남을 위해 베푸는 삶을 산 이 시대의 주연들을 마주하면서 이곳은 아직 ‘살만한’ 세상이란 걸 믿게 됐다. 착한 사람이 주류인 살만한 세상. 이 뜨겁고도 아름다운 순간 속에서 매일을 살아온 그들의 눈동자가 그걸 증명했다.
취재가 끝난 후 기자도 이 기적 같은 기차에 함께 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포장도 뜯지 않은 색연필과 찻장 속 주방 도구들, 모자 몇 개를 모아 편지 한 장과 함께 동봉하자 꽤 두둑한 상자 몇 개가 눈앞에 놓였다. 그리고 그 순간 기자의 손에도 조그만 퍼즐 조각이 쥐어졌다.
무거운 기부 박스만큼이나 뿌듯한 마음을 가득 안고 나오는 길, 기부 영수증 한 장을 받았다. 이름 석 자가 적힌 네모난 영수증을 일기장에 고이 붙이고는 오늘 하루를 꾹꾹 눌러 담은 일기를 썼다. 그리고 일기장을 덮기 전 마지막 문장이 참 마음에 들어 조용히 읊었다. ‘까불이, 니들이 아무리 날뛰어봤자 쪽수로 못 덤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