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오세요, 호남의 유라시아에”

고려인 마을

2022-03-22     취재팀

Prologue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조선에서 연해주 지역으로 떠나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을 포함한 등지에서 활발히 항일운동을 펼치던 독립운동가들이 있었다. 이들을 포함한 수많은 고려인은 스탈린 강제 이주 정책으로 인해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으로 흩어졌다. 1990년대에 그 일부가 한국으로 돌아와 정착한 결과 국내에는 여러 개의 고려인 마을이 형성됐다. 광주 고려인 마을은 전국의 고려인 마을 중 4번째 크기를 자랑하면서도 가장 끈끈히 마을 공동체를 유지하고 있다. 그 이유가 궁금해진 기자는 곧바로 광주광역시(이하 광주시) 광산구 월곡동 고려인 마을을 찾았다.
 

 

우리는 하나입니다
고려인 마을에 도착한 기자는 신조야(67) 대표를 만나기 위해 ‘고려인마을종합지원센터’에 방문했다. 건물 외벽에는 다양한 중앙아시아 전통의상을 입은 캐릭터들이 그려져 있었고, 건물 안 노인복지센터로 들어가니 아늑한 분위기를 풍겼다. 센터 직원들의 환영 인사를 받고 주위를 둘러보니 이미 자리에 앉은 손님이 있었다. 바로 신 대표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방문한 마을 자원봉사자와 소방 교육 안내 일정을 잡기 위해 온 광주시 소방관들이었다. 각기 다른 목적으로 모인 이들이었지만, 신 대표는 모두를 환영하며 식탁에 모인 모두에게 우즈베키스탄의 전통 빵, 리뾰쉬카(лепёшка)와 홍차를 대접했다.

 

마을이 낯설었던 소방관들이 자원봉사자에게 마을 시설에 관해 묻기 시작했다. 이에 그는 “마을은 고려인들을 위해 교육 기관과 임시 거주 숙소, 방송국 등의 시설들을 갖췄다”며 “마을 구성원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정착한 고려인이 늘어나 국내에서 가장 유기적으로 결집한 고려인 마을이 됐다”고 소개했다. 옆에서 이들의 대화를 듣던 기자는 생각보다 고려인 마을에 대한 사회의 인식이 저조했음을 깨달았다.

 

우즈베키스탄에서 한국에 온 지 20여 년이 됐다는 신 대표는 “나의 조상은 한국인이기에 내 정체성을 되찾으러 왔다”고 말했다. 또한 센터 설립의 취지를 묻자 신 대표는 많은 고려인이 한국 정착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는다며 “부동산 계약, 의료, 취업 등 어떤 일이든 도와주며, 무엇보다 부당한 대우로 피해 보는 일이 없도록 힘쓴다”고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고려인은 한국 국적이 없어 투표나 보험과 같은 권리 행사가 힘들다. 신 대표는 “이들의 국적 취득이 수월해진다면 모두가 한국인으로서 열정적으로 살 것”이라며 고려인 정착을 바랐다.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마을 중심으로 가기 위해 이순옥(62) 해설사와 함께 센터를 나온 기자의 눈에 쓰이지 않는 주택들이 들어왔다. 이 해설사는 “해당 주택들은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으로 매입한 건물이며 공원, 커뮤니티 공간, 셰어하우스 등으로 새단장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광주 고려인 마을에는 광산구청의 공식 집계로 6천 명, 비공식적으로는 1만여 명의 고려인이 거주 중이다. 고려인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듯, 건물의 간판은 대체로 러시아어로 적혀 있거나 한글과 러시아어가 혼용돼 있었다.

 

그중 고려인이 운영하는 가게가 눈에 띄었고, 기자는 바로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식료품점과 카페를 겸하던 가게는 이국적인 벽지와 소품이 즐비해 있었고, 러시아어로 적은힌 제품이 많아 기자가 외국에 있는 듯한 느낌을 줬다. 가게를 방문하는 사람도 고려인이 대부분이었다.

 

2012년에 한국으로 정착한 이곳의 주인 전올가(37) 씨 역시 정착 및 취업 과정에서 마을종합지원센터의 도움을 받았다. 가게를 떠나기 직전, 기자가 러시아식 팬케이크인 블린(Блин)에 호기심을 보이자 전 씨는 한번 먹어보라며 선물했다. 마을 주민들은 대체로 베풂과 도움에 익숙해 보였다.

 

블린을 들고 가게를 나온 기자는 먹을 장소를 물색하다 다모아 어린이공원 정자를 찾았다. 이 공원은 마을 추진위원회에 의해 홍범도 공원으로 탈바꿈돼 중앙 단상엔 홍범도 장군의 흉상이 설치될 예정이다. 공원 곳곳에는 한글과 러시아어가 섞인 낙서가 그려져 있어 각각의 문화가 공존하는 듯했다. 또한 정자 건너편 공터에는 마을 아이들이 둘러앉아 러시아어로 대화하며 휴대전화 게임을 하고 있었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영락없는 초등학생 같은 모습에서 기자의 어린 시절 같은 익숙함이 풍겨왔다.

 

그들을 안은 공간들
한국에 사는 고려인 대부분이 내국인으로 포함되지 않기에 각종 복지 적용에 한계가 있다. 그들이 어떻게 사회 복지 서비스를 받고 있을지 궁금해진 기자는 이 해설사를 따라 고려인 광주진료소로 향했다. 그곳에선 광산구의 의료진들이 의료보험을 받지 못하는 고려인을 위해 매주 화요일 오후 7시~오후 8시 반에 무료로 진료를 제공하고 있었다. 일반 병원과는 달리 저녁에 진료소를 여는 것은 고려인들이 대체로 늦은 시간에 퇴근하기 때문이다. 이 해설사는 “진료소에선 간단한 치료를 하고 암, 출산과 같은 전문성을 요구하는 수술은 광주 시내의 자 병원에서 정밀한 치료를 받도록 지원한다”고 설명했다.

 

진료소를 둘러본 기자가 건물 밖으로 나와 대로를 지나니 차례로 공립지역아동센터, 청소년 문화센터, 다문화아동커뮤니티센터가 보였다. 고려인 마을의 어린이들은 방과 후에 나이에 맞는 센터를 찾아 한국어, 러시아어, 악기 연주 등 다양한 수업을 듣고 있었다. 기자는 청소년 문화센터에서 수업이 진행 중이라는 소식에 학생들의 수업 상황이 궁금해져 센터 입구를 찾았다. 계단을 내려가 조심스럽게 문을 여니 마을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글 수업이 한창이었다.

 

이곳의 교사 박 빅토리아(36) 씨는 종합지원센터의 권유로 마을의 교사 일을 시작했다. 평소 사람을 돕는 것을 좋아하는 그는 “항상 학생들에게 일상 속 한국말 사용에 어려움을 느끼면 꼭 전화를 달라고 한다”고 말했다. 바쁜 생활 속에서도 마을 주민들을 위해 도움을 주는 그에게 반짝이는 열망이 돋보였다.

 

문화센터에서 나와 월곡 고려인 역사문화관 ‘결’로 향하는 길, 박 교사와 아이들이 인력사무소 앞에 옷 보따리를 내려놓고 있었다. 이 해설사는 겨울철 일을 하러 나가는 직원들이 춥지 않도록 여유분의 옷을 전하기 위해 모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그는 “한글에 능통한 고려인들은 통역, 숙박업소와 같이 대화가 잦은 곳에 취업하지만, 한국어가 서툰 고려인은 우선 농촌과 과수원으로 인력이 배정된다”고 전했다. 농업이 낯설 주민들이 이용하는 마을의 마트에서 논밭에서 사용하는 간이 의자를 팔고 있는 모습에 기자는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기다려주오, 난 돌아올 테니
마트를 지나니 멀리서부터 알록달록한 풍채의 역사문화관이 보였다. 외관은 고려인들이 3·1운동 4주년을 맞아 러시아의 우수리스크에 세운 고려독립선언기념문을 형상화한 모양이었다. 입구와 상통하게, 고려인 이주사 및 독립 항쟁 전시로 구성된 건물 내부는 독립운동가와 조상들의 얼을 담고 있었다. 2층에는 광주 한글학교 개교 30주년 기획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중앙아시아 고려인 집거지에 설립된 한글 교육 기관의 역사는 사진과 유물로 생생히 보관되고 있었다.

 

그곳에서 만난 김병학(57) 관장은 실제로 1992년 카자흐스탄의 우스토베 광주 한글학교에서 고려인들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김 관장의 어조에선 경험에서 나오는 강직한 힘이 느껴졌다. 이어 관람한 고려인 문학 전시관엔 러시아 시인 콘스탄틴 시모노브의 시 「기다려주오」가 보였다. ‘기다려주오, 난 돌아올 테니까’라는 첫 구절은 현재 고려인들의 상황과 맞물려 다가왔다.

 

김 관장과 인사를 마친 기자는 마지막으로 마을 공원 앞의 숲속 작은 도서관에 방문했다. 도서관 설립 재단은 마을 아이들에게 교육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카페를 도서관 형태로 개조했다. 선주민이 이주민을 위해 마련한, 작지만 큰 공간이다. 본래 유치원 교사였던 임양희(52) 관장은 작년 도서관 설립부터 마을 아이들의 교육을 맡아왔다. 그가 생각하는 도서관의 취지는 상업성 교육이 아닌 언어의 소통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다시 둘러본 도서관에는 책꽂이 외에도 다양한 그림과 언어, 조형 작품들이 걸려 있는 게 보였다.

 

임 관장은 “고려인 아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여러 문화를 접한 덕분인지 남다른 시야를 지녔다”고 말했다. 이 말을 뒷받침하듯 모두가 더불어 사는 세상을 그린 그림이 유독 눈에 띄었다. 한편 어른과의 의사소통 문제를 호소하는 아이들도 있다며 “수업 시간에 한국말이 유창한 아이가 친구에게 통역해주던 중 담임의 오해를 받았다”고 안타까워했다. 기자는 이러한 일들이 마음속 흉이 되지 않길 바라며 훗날 성장한 아이들이 한국에 잘 정착할 수 있도록 모두 함께 이해와 배려로 보듬어 주길 소망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고려인에 대한 인식이 한층 높아지길 바라며 기자는 마을 주민들에게 인사를 고했다.


 

Epilogue
고려인 마을이 세간의 관심을 받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신 대표는 “홍범도 장군의 봉환을 계기로 많은 한국인이 마을의 존재를 알았고, 우리를 후원해주는 업체도 많아졌다”고 말했다. 그들은 여전히 한국 문화의 전통을 지키려 노력 중이다. 그런 그들을 낯선 시각으로 바라보기보다 같은 민족의 뿌리를 가졌다는 마음으로 응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