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넬이 쏘아올린 고민: 가치 있는 사치란
우리는 물질에 매몰되어 있다. 집, 자동차, 옷, 신발, 전자제품, 가구 등… 유명한 사진작가 안드레아스 거스키의 작품이 떠오른다. 거스키는 ‘99센트’라는 작품에서 수많은 공산품이 끝없이 쌓여있는 모습을 아주 거대한 사진으로 보여줬다. 이 작품의 거대함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지나치는 마트의 모습을 관조적으로 볼 수 있는 관점을 제시했고, 생산과 소비가 집중되는 모습을 극단적으로 보여줬다. 마트는 소비지향적인 현재 자본주의 시대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장소이다.
아마도 그래서 8년 전, 샤넬이 패션쇼에서 대형마트를 구현한 모습이 충격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이 패션쇼의 마트는 현실의 마트보다 더욱 화려한 색깔을 뽐냈다. 수많은 제품이 거대한 세트장을 가득 채웠고, 각각의 제품은 샤넬의 마크를 달고 나왔다. 그만큼 그 뒤에 압도적인 자본이 있다는 뜻이었다. 마트가 자본주의의 상징이라면, 샤넬의 마트는 자본주의의 극한이었다. 심지어 샤넬은 소비하기 위한 마트가 아니라 꾸미기 위한 마트를 형성했고, 일회성이었다. 샤넬은 항상 이렇게 화려하고 자본이 응축된 패션쇼를 만들어왔다. 세트장에 바다를 만들기도 하고, 폭포를 만드는가 하면 200톤이 넘는 얼음을 가져온 적도 있었다. 샤넬은 단 한 번의 패션쇼를 위해 엄청난 자본을 들이부어 어마어마한 규모의 무대를 구성했다. 패션이 구현할 수 있는 물질적 가치를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샤넬은 왜 이토록 화려한 패션쇼를 보여주었을까? 패션쇼는 다음 시즌의 새로운 컬렉션을 보여주기 위해 열리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마케팅이다. 전 세계의 바이어와 MD, 잡지사 등 모든 패션산업 관계자를 상대로 상품을 광고하고 어필하는 자리다. 최근에 패션쇼는 단순히 상품을 보여주는 것에서 나아가 브랜드의 이미지, 철학 등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매체가 됐다. 궁극의 브랜딩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패션쇼는 상품과 브랜드를 홍보하는 자본주의적 맥락에서 확대된 개념이다.
자본주의는 패션의 세계를 지배한다. 특히 사람의 껍데기를 꾸미는 역할을 하는 특성상, 패션은 자본주의의 양극화된 경제적 계층을 더욱 공고히 하는 수단으로 활용돼 왔다. 럭셔리 패션은 상류층만이 즐기는 사치였고, 하층민과 구분될 수 있는 대표적인 방법이었다. 샤넬의 호화로운 패션쇼는 브랜드의 물질적 가치를 암시하며 럭셔리 패션으로서의 위상을 굳혔다. 하지만 정말 이렇게 패션이 전하는 물질적인 가치에만 집중해야 할까? 패션이 보여줄 수 있는 건 물질적인 가치가 전부일까?
경제학자 장 카스타레드는 『사치와 문명』에서 현재 사회는 지나치게 물질적 가치만 중시한다고 지적하며 사치의 개념을 새롭게 제시했다. 사치는 물질적 화려함과 정신적 화려함을 모두 아우르고 특히 예술, 종교, 문화, 사상의 풍요로움을 추구하며 인류 문명의 발전에 기여해왔다는 것이다. 사치란 정신적 풍요를 포함하는 개념이었다. 우리는 좋은 물건들로 둘러싸이는 것뿐만 아니라, 좋은 삶과 좋은 세상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삶을 돌아보고, 사람들을 눈여겨 바라보고, 세상을 둘러봄으로써 추구할 수 있는 가치다.
우리는 패션이 전달하는 이야기에 좀 더 주목하고 귀를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패션은 항상 삶과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왔기 때문이다. 샤넬도 여성의 편안한 움직임과 당당한 삶을 외쳐오지 않았나. 많은 디자이너는 규범의 전복과 해체와 탄생을 보여주었다. 이것이 바로 패션이 가치를 추구하는 방법이다. 인간과 사회가 발전하기 위한 중요한 사치 말이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샤넬을 보며 여성의 삶을 이롭게 했던 이야기를 떠올리지 않는다. C가 겹친 로고만이 중요한 가치를 갖는다. 그럼 난 여기서 질문을 던지겠다. 우리가 어떤 사치를 지향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It is only with the heart that one can see rightly: what is essential is invisible to the eye. (마음으로 봐야만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다.)” - 생택쥐페리, 『어린왕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