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언론 정체성 유지하고 빠른 변화 추구해야”

창간 75주년 1500호 기념 특별 인터뷰 김수복(본지 30기 기자) 우리 대학 18대 총장

2023-03-07     대담: 신동길 편집장

수습기자 시절이 제일 기억에 남아
신문 배부와 회의의 연속
통금 걸려 신문사에서 쪽잠 자기도
지금 보니 가장 정겹고 행복해

체제와 전통만 고수해서는 안돼
영상으로 빠르게 변화하는 언론 흐름
시대적 전환에 대비해야
다양한 유형의 콘텐츠 활용 필요

단대신문은 내 인생의 ‘배’
문학적 인생에 많은 영향
주간 시절 윤동주 시인 기념 행사 진행
함께 해준 선후배들에게 고마워

Prologue
50년을 단대신문과 함께해온 사람이 있다. 패기 넘치는 20살 수습기자부터 신문의 모든 걸 책임지는 편집장과 학생 기자를 가장 가까이서 지원하는 편집국장, 학생 기자를 지도하는 주간 교수까지 맡은 이른바 ‘단대신문의 큰 어른’이다. 이제는 우리 대학의 총장이자 본지의 발행인으로서 격려와 지원을 아끼지 않는 본지 30기 동우인 김수복 총장을 만나 단대신문에 대한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단대신문 30기 기자로 입사하셨는데요, 어떤 계기로 학생기자를 지원하셨나요?
입학을 1974년 3월에 했는데, 입학하기 전 고등학생 시절부터 문예반 활동과 교지 제작을 하면서 자연스레 언론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등교하면서 학교 정문 수위실 옆에 쌓여있는 신문을 보자마자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단번에 들었어요.

 

▶그 당시에는 신문사 입사가 꽤 힘들었을 것 같은데요.
강의실 두 개를 빌려서 일반 상식과 기사 작성에 관련된 논술 시험을 봤습니다. 선발 인원은 열 명 가까이 되었는데, 100여 명이 지원을 한 것 같았어요. 이른바 ‘1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단대신문 30기 수습기자로 선발된 거죠(웃음).

▲김수복

 

▶그때와 지금의 신문 제작 방식이 많이 달랐을 것 같은데, 어떤 방식으로 신문을 만드셨는지 궁금합니다.
지금은 디지털 방식으로 원고를 수합하고 신문을 제작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당시는 그런 게 없었죠. 직접 원고지에 기사를 쓰고 담당 부장기자에게 컨펌 받으면서 신문을 제작했습니다. 수습기자 시절에는 선배 기자들에게 많이 혼나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다 후배들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했던 진심어린 충고와 조언이었던 것 같아요. 기사 작성이 되면 수습기자는 인쇄소로 가서 문선, 조판된 기사를 교정을 보고, 선배들이 조판된 대장을 OK 놓으면 제판, 인쇄에 들어갈 것을 보고 퇴근하는 일상이었지요.


▶신문사 생활을 하시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였는지 궁금합니다.
무엇보다도 수습기자 시절이 가장 기억에 많이 남는 것 같습니다. 신문을 다 인쇄하고 나면 수습기자들이 그걸 차에 실어서 학교로 운반한 뒤 선배들과 신문을 평가하는 편집회의를 거친 후 우편 발송을 준비했어요. 종이 띠에 물을 묻혀 붙이고 주소를 쓰다 보면 어느새 통금시간이 되어 집에 가지도 못하고 신문사에서 다 같이 잤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벌써 50년이 다 돼가지만, 인생에서 가장 정겹고 행복했던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학생기자를 하며 학업을 챙기기가 쉽진 않았을 것 같은데, 학업 병행이 힘들진 않으셨나요?
학교 내 담당 부서를 찾아 기사 아이템을 얻거나 직접 취재하다 보니 수업을 빠지는 경우가 많아 기자들 대부분 학점이 좋진 않았죠(웃음). 그럼에도 학생기자 생활을 이해해주시고 인정해주시는 교수님들께서는 그리 나쁜 시선으로만 보시지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4학년 1학기까지 총 3년 6개월을 단대신문 기자로 활동하셨습니다. 단대신문 경험이 총장님께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신문사 기자를 하면서 스스로 금요일마다 완행열차를 타고 역사 현장 탐방을 떠났습니다. 아직도 그 기억들이 생생한데, 시외버스를 타기도 하고 두 발로 걷기도 하며 전국의 다양한 역사 현장을 직접 방문했어요. 이런 경험을 거의 4년 동안 하다 보니 나의 문학적 삶과 시를 쓰는 데 큰 영향을 줬다고 생각합니다. 

 

▶교직원인 편집국장으로 다시 단대신문에 돌아오셨어요. 어떤 계기로 돌아오시게 됐는지 궁금합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지 1년이 되던 1979년에, 당시 편집주임이었던 신문사 선배로부터 자기 자리를 맡아달라는 연락이 왔어요. 그렇게 우리 대학 출판부 일과 신문사 편집주임을 맡으면서 다시 단대신문으로 돌아왔습니다. 6개월 동안 주임으로 근무했을 때, 편제가 편집국장으로 바뀌면서 우연찮게 단대신문의 마지막 편집주임과 첫 번째 편집국장에 이름을 올리게 된 겁니다.

 

▶그렇게 계속 활동을 하시던 중 본지의 6대 주간으로 임명되셨습니다. 느낌이 남다르셨을 것 같아요.
1985년 9월 1일에 천안캠퍼스 한국어문학과 교수로 부임했고, 1992년 3월 1일에 편집인 겸 주간을 맡게 됐어요. 발령을 받고 나서 정말 기쁜 마음이었고, 기자들도 신문사 선배가 주간으로 와서 그런지 신문사 내부 분위기가 아주 좋았던 것 같습니다.

▲본지

 

▶신문사 주간으로 계시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으실까요?
내가 한국 현대시를 주로 연구해서 석·박사 학위 논문을 모두 윤동주 시인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고, 『별의 노래』라는 윤동주 시인 평전까지 출간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주간으로 있을 때 윤동주 시인 50주기를 맞이했어요. 그래서 지금도 단대신문 조판을 진행하는 ‘한국대학신문’을 주관으로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 앞에서 위령제도 지내고, 윤동주 시인이 다녔던 교토의 동지사 대학에서 기념 심포지엄을 했던 일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교정에 윤동주 시비도 건립하였지요. 이런 기념행사를 진행할 수 있었던 것도 내가 단대신문 주간으로 있었던 덕분이라 생각해요.

 

▶이제는 우리 대학의 총장으로서, 단대신문의 발행인으로 계신데요. 신문사 선배로, 현재 신문의 평가를 부탁드립니다.
예전에 비해 신문의 체제나 편집의 스타일이 제대로 갖춰져 있다는 생각이 들고, 기사들도 예전에 내가 썼던 기사보다 잘 쓰는 것 같아요. 무엇보다 지금까지 쉬지 않고 달려오며 창간 75년과 1,500번째 발행까지 그 전통을 이어온 후배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본지

▶그렇다면 단대신문이 앞으로 추구해야 할 방향은 어디일까요?
지금 언론이 종이 신문에서 영상 매체 쪽으로 변화하고 있는 시대적 전환이 다가오고 있고, 인공지능을 활용해 다양한 콘텐츠를 만들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고 있는 상황인데, 우리가 기존의 단대신문 체제와 전통만 계속해서 고수하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는 독자들이 활자에 익숙하지 않을 시대가 될 텐데, 이제는 빠르게 변화를 추구하면서 학생 언론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해 보이며, 신문사 유튜브를 한번 운영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웃음).

 

▶지금 현직에 있는 후배 기자들에게 간단한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아마 지금 1,500호 특별호 신문을 만드는 경험이 인생에서 다신 없을 기회인데, 이런 부분에 대해 충분히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고 생각해요. 학생 기자 생활을 하며 마주치는 다양한 고민과 갈등들을 극복해 나가면서 단대신문사 활동이 후배들 인생에 훌륭한 자양분이자 앞으로의 삶에 있어 원동력이 되기를 기원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네요.

 

▶김수복 총장님께 ‘단대신문’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나야 어쨌든 단대신문에서 청춘을 시작했고, 이제 일흔이 다 되어 가는데, 단대신문은 인생이란 항해에서 근 50년의 세월 동안 나를 안전하게 지켜준 ‘배’와 같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과정을 거쳐 오면서 여러 가지 어려운 파도들이 있었을 텐데, 단대신문 덕분에 무사히 헤쳐 나아갈 수 있었던 적이 많습니다. 그 배에 함께 해준 신문사 선후배들에게도 고맙다고 말해주고 싶네요.

 

Epilogue
수습기자와 편집장을 거쳐 편집국장, 주간, 이제는 발행인까지. 그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그의 삶과 단대신문은 정말 수어지교와 같은 관계였음을 여실히 깨달았다. 김수복 총장은 단대신문을 ‘인생이라는 항해를 안전하게 할 수 있도록 해준 배’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다르게 바라보니 단대신문이 이렇게까지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에는 ‘김수복’이라는 훌륭한 선원이자 선장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