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세상이 무너지던 날, 나를 일으킨 건 그림이었다"
정은혜(34) 작가 다채로운 색감으로 따뜻한 위로 전해 고유한 개성 담은 대상의 실제에 집중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도 출연
경기도 양평군에 소재한 한 작업실, 알록달록 다채로운 그림과 함께하는 작가가 있다. 인기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 ‘영희’역으로 출연해 대중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정은혜 작가는 밀려드는 작업 의뢰에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정형화되지 않은 독특한 그림체로 따뜻한 위로와 응원을 전하는 선한 영향력을 퍼뜨리는 예술가, 정은혜(34) 작가를 만나봤다.
-일과가 궁금하다.
“나를 돌봐주는 활동 보조 선생님이 계신다. 아침에 일어나면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나갈 준비를 한다. 동료들과 함께 먹을 도시락을 싼 후 나의 직장인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 일터’ 공동 작업실로 출근한다. 오전 9시부터 동료들과 함께 그림 작업을 하고 보통 오후 1시에 점심을 먹는다. 1시 이후에는 개인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시간을 보낸다.”
-작업 과정은 어떻게 되나.
“일상생활 속에서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은 것들을 사진 찍어 놓는다. 가장 기억하고 싶은 순간을 담는 것이다. 그리고자 하는 대상을 사진으로 찍어 놓으면 더 자세히 관찰해서 그릴 수 있다. 그렇게 담은 것을 내가 원하는 색으로 그려나간다. 연필로 먼저 대상의 형태를 스케치하고 채색할 때는 보통 아크릴 물감을 사용한다. 아크릴 물감은 건조가 빠르고 물에 지워지지 않아 다루기 편하다는 장점이 있다. 작업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는 편이다. 앉아서 그리기 시작하면 하루도 안 걸려 금방 완성한다.”
-작업할 때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
“대상의 실제를 그리기 위해 노력한다. 세상에 예쁘지 않은 존재는 없다. 저마다 고유한 개성을 갖고 있다. 나는 그것을 발견하고 그대로 구현하는 데에 몰두할 뿐이다. 또한 내 손에서 탄생한 작품들은 대체로 색감이 다채롭다. 이는 어떠한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다. 대상을 봤을 때 느껴지는 감각에 집중하고 이를 표현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
-가장 애정하는 작품이 있다면.
“내가 그린 모든 그림을 사랑하지만, 그중에서 하나를 뽑자면 ‘쌍둥이 자매’다.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를 함께한 한지민 배우와 나의 모습을 담았다. 오랜 시간 촬영을 함께하면서 매우 친해졌다. 좋아하는 사람의 모습을 그려서 기억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그래서인지 작업을 하면서도 매우 행복했던 것 같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순간을 기억하는지.
“2013년 2월 27일. 내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날이다. 잡지 속 향수를 들고 있는 외국인을 보고 그린 게 내 첫 작품이다. 홍익대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어머니가 그림에 재능이 있는 나를 알아보고 적극적으로 지원해 줬다. 어머니의 화실에 나가 뒷정리하고 청소하며 용돈을 벌었다. 이후 2016년부터 경기도 양평군 ‘문호리 리버마켓’에서 캐리커처를 그리며 본격적인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작업이 힘들었던 적은 단 한 순간도 없다. 그림을 그리는 모든 순간이 즐겁고 행복하다.”
-생명체를 담은 작품이 많은 이유는 무엇인가.
“모든 생명을 사랑한다. 살아 숨 쉬는 모든 것은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 나는 그런 존재들에게 직접 그리는 그림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사람이다. 특히 사람을 좋아하는데, 대화로 교감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게 늘 설렌다.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다는 것을 느끼고 나 또한 사랑을 주면서 행복해진다. 예전에는 사람 위주로 작품 활동을 많이 했지만, 요즘에는 동물, 꽃 등 다양한 생명체와 사물까지 그리고 있다.”
-가장 좋아하는 전시회는 무엇인가.
“미국 뉴욕에서 개최했던 데뷔 전시회 <나의 강아지, 지로>가 가장 좋다. 지로는 10살 된 나의 반려견이다. 유기견이었고 당시에 구조 후 입양했다. 지금 지로는 나의 사랑하는 가족이다. 전시회 작품에서는 지로와 함께한 일상 속 소중한 순간들을 담아냈다. 아끼는 존재를 그린 만큼 작업 중에도 매우 즐겁고 행복했다. 이전까지는 다양한 인물화를 주로 그렸던 터라 새로운 도전이기도 했다. 근래에는 10월에 있을 주브라질 한국 대사관 초청 개인전 준비를 시작했다. 브라질 사람들의 모습을 개성 있게 담아낼 수 있도록 노력하려 한다.”
-유튜버로 활동하게 된 계기는.
“많은 사람에게 내 일상을 공유하기 위해 시작했다. 내 채널인 ‘니얼굴_은혜씨’를 기획하고 유튜버로 데뷔하는 데에 있어 가족들이 여러 도움을 줬다. 유튜브에 별로 관심이 없었으나 유튜브, 쇼츠 콘텐츠 등으로 정보를 접하는 경우가 많다는 소식을 듣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두려움도 있었다. 하지만 대중과 꾸준히 소통하고자 용기 내 도전하게 됐다. 덕분에 언제 어디서든 댓글을 통해 팬분들의 응원을 느낄 수 있어 좋다. 앞으로도 다양한 주제로 찾아뵐 예정이니 응원해 주길 바란다.”
-함께하는 직장 동료는 어떤 의미인지.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존재다. 어릴 적 거주했던 지역에는 특수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일반 학교에 진학했고, 비장애인 학생들 사이에서 생활하는 내내 친구가 없었다. 차별 어린 시선에 늘 괴롭기만 했고 초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동료들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직장 생활을 시작하며 계속해서 나를 괴롭혀 왔던 외로움이 사라졌다. 그들은 나와 마찬가지로 장애가 있다. 틱 장애, 자폐스펙트럼, 시각 장애 등등. 장애의 유무와 종류는 아무 상관이 없다. 사소하지만 그저 즐겁게 이야기하고, 밥 먹고, 작업하며 함께 하는 모든 시간이 행복하다.”
-가장 행복한 순간과 힘들었던 순간은 언제인지.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 출연한 이후 나를 찾아주는 사람도, 응원해 주는 팬들도 생겼다. 유명해지면서 작가로서 더 많이, 다양한 작품을 그릴 수 있게 돼 행복한 순간이 많아졌다. 그림 작업을 하는 순간도 행복하지만, 밥을 먹거나 커피를 마시는 등 소소하고 편안한 일상이 있다는 것도 늘 감사하다. 가장 힘들었던 때는 23살쯤이다. 이미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시선 강박증이 생겼고 조현병과 틱 장애까지 동시에 찾아왔다. 새벽만 되면 온 세상이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나를 위로해 준 것이 그림이었다. 연필을 잡고 도화지를 마주한 이후로 나를 힘들게 한 모든 게 사라졌다.”
-도전하는 청춘들에게 한 마디.
“뭐든 포기하지 말길. 열심히 공부해서 꼭 목표하는 바를 이루길 바란다. 취직하고 직장 생활을 하며 동료들과 즐거운 나날 보내기를. 뭐든 과한 건 좋지 않다. 사소한 것에도 늘 행복이 있으니 이를 찾는 데에 열중하기를 바란다.”
보이지 않는 벽에 좌절하던 순간, 정은혜 작가를 다시 일어서게 한 건 온 힘을 다해 열정을 쏟을 수 있는 존재인 그림이었다. 우리는 무언가에 그토록 열중한 적이 있는가. 힘들었던 시간을 극복하고 힘차게 다시 일어난 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큰 희망과 용기를 선사한다. 앞으로 펼쳐질 정 작가의 여정이 더욱 아름답게 빛나길, 그의 색채가 더 많은 이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물들이길 바라본다.
"나라는 존재를 인정받는 게 행복해"
정은혜 작가는 그림을 그리는 이유에 대해 “사람들이 원해서, 내 그림을 찾는 사람이 많고, 내 힘과 노력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이 늘 뿌듯하고 행복하다”라고 말했다.
정 작가는 다른 발달장애인 동료들과 함께 그림을 그리고 월급을 받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을 통해 정당한 대가를 받는 것은 곧 ‘나’라는 존재를 인정받는다는 것이다. 화가, 배우, 작가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고 능력으로서 인정받는 그의 행보는 ‘보호’의 존재로만 국한되던 장애인에 대한 고정관념을 타파하고 있다.
정 작가는 늘 “내 꿈은 다 이뤘다”고 말한다. 소소한 일상의 소중함을 아는 그는 더 이상 바라는 게 없다. 든든한 버팀목이 돼주는 가족과 동료들, 열렬히 응원해 주는 팬들까지. 이들에게 받은 사랑을 세상에 나누기 위해 그는 오늘도 붓을 쥔다. 1990년생. 호산나 대학 서비스학과 졸업. 2019년 초대전 <니얼굴의 은혜씨>로 작가 데뷔. ‘서울문화재단 잠실창작스튜디오’ 10·11기 입주 작가. 2020년 유튜브 채널 `니얼굴_은혜씨' 운영. 2022년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 출연. 현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 일터’ 재직 중.
우하혜나 기자 cloud0707@dankook.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