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말하는 민주주의

2025-04-08     김미지(국어국문)교수

 

'87년 체제' 종언에 대한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민주화 운동 이후 탄생한 87년의 헌법은 민주주의 가치와 질서 및 제도 확립이라는 그 시대의 소명과 정신을 담고 있다. 하지만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면서 발전되고 형성된 새로운 가치나 시대정신을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이 팽배한다. 그것이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무엇을 담아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완전히 새로운 건 아니다. 그러나 논의의 실행과 구현의 과정에서 당분간 시끌벅적할 것임은 틀림없다. 개헌이라는 과제가 당장의 정치적 문제들 때문에 본격적으로 수면 위에 올려진 것이긴 하나, 사실은 21세기도 4분의 1이나 지난 이 시점에 우리 사회의 가치와 방향성을 놓고 다시 한번 따져 물어야 할 것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주권자인 국민이 염원하던 제도적 민주주의가 확립된 뒤 그 이후에 남은 것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논의는 이미 87년 헌법이 만들어진 직후부터 나온 바 있다. 즉 제도적 민주주의란 민주공화국이 보증해야 할 최소한의 기본 조건일 뿐, 우리의 삶과 일상 그리고 문화에 민주주의적 가치가 실제로 뿌리내리는 일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정치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는『불화』에서 공안 정치(독재정치)는 공공연한 폭력과 배제를 통치의 기반으로 한다면 합의 민주주의에서는 동일화 전략을 취함으로써 오히려 배제를 수행한다고 썼다. 즉 노골적인 폭력과 차별 그리고 배제가 공안 정치의 특징인 것과 달리 합의 민주주의에서는 정치 공동체 내의 사람들을 동등한 권리의 주체이자 시장의 성원으로 만듦으로써 여기에조차 끼지 못하는 이들을 `없는(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든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동등한 권리를 누려야 할 시민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들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인할 수 있는가? 여기서 일일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어떤 존재들을 `우리'와 다르다는 이유로 배제하며 그들의 몫을 부정하고 있지 않은가.

 

합의 민주주의라는 `바람직한 최저의 몫'을 획득한 87년 이후, 우리 사회는 조금은 더디지만 하나씩 하나씩 일상에 민주화를 뿌리내려 왔다. 법이 만들어진다고 해서 세상이 한꺼번에 바뀌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남녀고용평등법'(1987)이나 `성폭력특별법'(1993)이 만들어지고 `가정폭력방지법'(1997), `유급 육아휴직제'(2005)와 같은 것들이 생겨나면서 세상이 달라지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누구나 민주주의를 말하고 자신이 민주주의의 수호자임을 자처하는 시대지만, `누구나'의 평등과 `몫 없는 자들의 몫'이라는 가치를 다시 되새겨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