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사람도, 사소한 역사도 없다”…  역사에 생명을 불어넣다 - 박건호 역사 컬렉터

“수집은 곧 기억의 복원”···30년 여정이 밝히는 잊힌 역사 노비 호패부터 38선 표지판까지, 유물이 말하는 시대정신 올해 광복 80주년, 진정한 해방은 ‘분단 극복’으로부터

2025-06-10     손예원 기자

 

박건호

역사는 기록이자 기억이다. 그러나 모든 역사가 반드시 책 속에 기록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오래된 종잇조각 속에서, 혹은 작은 물건 속에서 역사의 숨결을 포착해 낸다. 그런 숨겨진 흔적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사람이 있다. 시대의 잔재 속에서 사료를 수집하고 해석해 온 30년, 침묵하는 사료의 서사를 오늘의 언어로 되살리는 박건호(56) 역사 컬렉터를 만났다.

 

-‘역사 컬렉터’는 어떤 일을 하는가.
“역사 컬렉터는 내가 만든 표현이다. 단순히 물건을 모으는 수집가가 아니라 글쓰기·강연·해석 활동까지 포함한 역사 실천가를 뜻한다. 역사학자가 연구하고 교육하는 사람이라면, 나는 수집을 중심에 둔 활동을 한다. 사료를 수집하고 그에 담긴 이야기를 발굴해 사회에 유의미한 기록으로 전환하는 일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 수집한 사료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 있다면.
“조선시대 노비의 호패를 꼽을 수 있다. 수집한 호패는 국내에 유일하게 남은 노비 호패로 인구의 약 30%를 차지했던 노비 계층의 역사를 증명하는 귀중한 유물이다. 불도장까지 찍혀 있고, 사회적으로 지워졌던 노비의 존재를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라 더욱 인상 깊었다.”

 

-수집한 사료를 통해 밝혀낸 흥미로운 역사적 사실이 있다면.
“경북중학교 돌비석 사진에서 ‘황국신민서사’ 흔적을 발견했다. 이를 통해 일제 말기 동원된 사상이 해방 후 어떻게 은폐됐는지 알아냈다. 또 충남 예산군의 범죄인 명부를 통해 독립 유공자 11명의 이름을 확인했는데, 당시에는 범죄인으로 분류됐지만 사실은 항일운동가였다. 기록을 통해 잊힌 존재를 다시 드러낼 수 있다는 점에서 보람을 느꼈다.”

 

-사료를 수집할 때 어떤 기준이나 철학을 가지고 있는가.
“불교에 화엄사상이라는 게 있다. ‘모든 것은 하나로 연결돼 있다’는 철학이다. 그 철학을 바탕으로 활동하고 있다. 사소해 보이는 물건 하나에도 당대의 시대정신이 담겨 있다. 사료를 수집했을 때 사료 속 어떤 역사가 직간접적으로 묻어 있는지를 탐구한다. 그 물건 속의 관계와 맥락을 읽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수집한 사료의 진위를 판단하는 기준이 있다면. 
“위조 가능성이 낮은 저가의 사료를 중심으로 수집하고 있다. 경매에서는 출품자의 이력을 확인하고 개인 거래에서는 판매자의 평판을 살핀다. 예전에 판매자가 팔았던 물품들을 보고 진위 여부를 직관적으로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수집 활동 중 가장 큰 어려움은.
“보관 공간 마련과 비용 부담이 가장 크다. 종이처럼 부피가 작은 자료를 중심으로 수집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보통 컬렉터들은 별도의 공간을 마련하지만, 나는 초창기부터 공간 효율을 고려한 수집을 해왔다. 한때 희귀한 크리스마스씰을 구입하기 위해 대출을 받은 적도 있는데 컬렉터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절제’다. 감당할 수 있는 범위에서 수집하는 게 중요하다.”

 

-개인적인 수집 활동이 사회적으로 어떤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하는지.
“첫번째로, 잊힌 역사를 발굴할 수 있다. 독립 유공자 11명의 사례처럼 기록은 있지만,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역사를 수면 위로 올리는 일이다. 두번째로, 법 제정 이전의 공공 기록물을 민간이 보존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예컨대 내가 소장한 1962년 외환 조달 관련 비밀문서는 박정희 정권 초기의 정책 방향을 보여주는 귀한 사료다. 이런 문서는 국가기관이 아닌 개인이 수집함으로써 보존되는 경우가 많다.”

 

-명덕외국어고등학교를 거쳐 현재는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역사 교육에서 가장 중점을 두는 부분은.
“살아 있는 역사를 지향한다. 학생들이 역사 개념을 단순 암기하지 않도록 실제 사료를 적극 활용해 왔다. 학생들이 졸음이 오는 시간대에는 호패나 칙서 같은 실물 사료를 직접 보여주며 수업 집중도를 높였다. 사료를 통해 그 속에 담긴 역사적 맥락과 사실을 함께 풀어내는 데 집중했다.”

 

-역사 교육을 통해서 학생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가 있다면.
“역사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 지금 이 순간도 모두 역사다. 학생들이 역사를 단순히 외우고 배우는 게 아니라 자신이 직접 만들어가는 것임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생활 속의 사소한 물건조차 역사적 의미를 지닐 수 있으며, 자신이 능동적인 역사 주체임을 자각하도록 돕고 있다.”

 

-책을 4권이나 낸 작가이기도 하다. ‘컬렉터, 역사를 수집하다’와 ‘역사 컬렉터, 탐정이 되다’를 집필하게 된 계기는.
“역사 사료를 수집하면서 이 작업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고자 2013년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에 진학했다. 하지만 막상 진학하고 보니 종이 기록이 아닌 디지털 기록과 자료에 대해 공부를 하게 됐다. 적성에 맞지 않아 연구보다는 책을 통해 기록을 남기기로 결심했다. 방송 출연과 출판사 유튜브 영상이 계기가 돼 후속편인 ‘역사 컬렉터, 탐정이 되다’도 출간하게 됐다.”

 

-저술 활동을 통해서 대중과 소통하시면서 느낀 점은.
“생각보다 역사 속 일상생활 문서를 다룬 책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책을 통해 대중에게 생활 문서의 소중함과 역사적 가치를 알릴 수 있다는 점에서 보람을 느꼈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문서도 관심을 가지면 한 세대의 역사가 담겨 있고, 하나만으로도 책 한 챕터를 쓸 수 있을 만큼 스토리텔링의 보물창고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책으로 전달하고자 한 메시지가 있다면.
“역사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삶 속에 존재하고 있다. 우리 일상 속 사소한 자료에도 중요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는 사람도 그 삶의 궤적은 하나의 역사로서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 ‘사소한 사람도 없고, 사소한 역사도 없다’는 말을 늘 강조한다.”

 

-역사학자로서 목표는.
“평생 10권의 책을 쓰는 것이 목표다. 현재까지 4권을 냈고, 평균 2년에 한 권씩 작업 중이다. 10권의 책을 통해 잊혔던 서민들의 생생한 이야기와 열전을 복원하고자 한다. 서민의 삶을 통해 역사를 풀어내는 작업을 앞으로도 계속 이어갈 계획이다.”

 

-이 글을 읽을 우리 대학 재학생들에게 한마디.
“이번에 아너스 특강 강연을 통해 학생들을 만났다. 역사에 대한 학생들의 열정에 감명 받았다. 기성세대의 틀에 얽매이지 말고, 무모하더라도 도전하길 바란다. 실패를 포용할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 또한 필요하다. ‘관성에 물들지 말고, 도전하라.’ 이 말이 내가 전하고 싶은 핵심 메시지다.”

 

박

분단의 시간 속에 해방의 의미를 묻다

올해로 광복 80주년을 맞이했다. 6.25전쟁 65주년이기도 하다. 심지어 역사에 길이 남을 ‘계엄령’ 사태 등으로 대통령이 탄핵당하며 민주주의의 위기를 경험하기도 했다. 민주화와 산업화를 이룬 나라지만, 여전히 분단이라는 숙제를 안고 있는 우리에게는 지나온 역사에 대한 성찰과 기록이 절실하다. 매 순간이 곧 역사로 남는 지금,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남겨야 할까.

 

박건호 역사 컬렉터는 올해 광복 80주년을 맞아 새로운 책을 집필 중이다. 그는 “일제강점기를 중심으로 해방 이전까지의 시대를 증언하는 사료 100여 점을 선별해 해설과 함께 엮은 책”이라며 “초고를 마치고 현재 출판사 편집 중”이라고 말했다. 박 컬렉터의 책은 광복절 전에 출간될 예정이다. 이어 박 컬렉터는 해결되지 않은 큰 문제는 분단이라며, 해방과 함께 떠안은 이 숙제가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뼈아픈 현실이라고 짚었다. “진정한 의미의 광복을 위해서는 남북 간 평화적 공존과 분단 극복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절실하다”고 덧붙였다. 

1993년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졸업. 1993~2000년 명덕외국어고등학교 역사 교사. 강남 대성학원 강사(현). 한국외대 대학원 정보기록학과 초빙교수(현). 2020년 ‘컬렉터, 역사를 수집하다’로 집필활동 시작. 

 

 

손예원 기자 mondegreen@dankook.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