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 뒤에서 겨우 숨을 쉬다

3.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

2026-05-19     문은강 칼럼니스트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가, 로맹 가리와 에밀 아자르가 동일인이라는 결론은 지금의 독자들에게 전혀 놀랍지 않다. 1975년 프랑스 문단은 혜성처럼 등장한 신인 작가 에밀 아자르에게 열광했고, 소설 ‘자기 앞의 생’은 공쿠르상을 받았다. 에밀 아자르는 이미 공쿠르상을 한 번 받은 60대 작가 로맹 가리였으며, 평론가들은 그들의 글에서 문체 유사성을 발견했지만, 로맹 가리는 이런 글을 쓸 수 없다고 단언했다는 사실도 잘 알려져 있다.

 

사후 공개된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에서 로맹 가리는 평론가들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사람들이 만들어준 얼굴에 구속되기 싫었다는 그는 자신이 만든 작가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에밀 아자르의 이름으로 쓰인 ‘가면의 생’에는 변신에 대한 욕망,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는 작가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전쟁 영웅, 외교관, 영화감독, 유명 작가. 그는 자신을 명명하는 수식에서 필사적으로 도망치려 했다.

 

물론 ‘로맹 가리’라는 상징성에서 떨어져 나와 본래의 얼굴을 찾고자 하는 그의 시도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다. 그를 둘러싼 억측이나 무분별한 이미지 소비만 떠올려 봐도 알 수 있다. 타인의 시선을 통해 만들어진 탑은 너무도 공고해서 쉽게 부술 수 없을 듯하다. 그러나 이름을 절단하고 다른 방식으로 꿰맨다고 하여 새로운 자아가 생기는 건 아니다. 밖으로 내쫓아도 기어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 오히려 보란 듯이 더욱 몸집을 부풀리는 것. 햇빛 아래 그림자보다 끈덕지게 쫓아오는 그것을 대체 무어라 불러야 좋을까?

 

인간이 하나의 육체를 가진 존재이며 그것을 갈아입는 일은 불가능하다. 로맹 가리는 그 불가능성에 정면으로 부딪힌 사람이었다. 이를 통해 그가 우리에게 남긴 잔인한 진실이 하나 있다면, 가면을 벗는 유일한 방법은 또 다른 가면을 쓰는 일이라는 것이다.

 

탈출의 통로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새로운 존재를 빚는 일이 과연 무용하기만 할까? 벌거벗은 몸으로 통과해 가는 삶은 외롭기 마련이고, 그토록 벗어내고자 했던 가면 하나가 나를 감싸주는 외투가 될 수도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누구도 건드리지 못할 나만의 가면 하나를 만드는 일은 곧 타인이 되어보는 상상이나 다를 바 없고, 그러한 작업이야말로 소설 쓰는 일의 첫걸음이 아니던가.

 

 

문은강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