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타처럼 걷자
작년 이맘때쯤 기자는 몽골 고비사막의 모래언덕 위에 서 있었다. 그곳으로 가는 길에는 표지판도, 갈림길도 없었다. 어디쯤 왔는지 가늠할 수 없었지만 그저 계속 가면 된다는 마음 하나로 발을 옮겼다. 어디에 있는지,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 단정할 수 없다는 사실은 사막에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사막을 벗어난 현실은 다르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가고 싶은 학과를 답해야 한다. 대학에 가면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다더니, 질문은 계속된다. 졸업하고 뭐 할 건지, 취업은 어디로 할 건지. 심지어 전공을 유예할 수 있다는 자율전공제마저 입학과 동시에 1지망을 묻는다. 대학 사회는 학생들을 반드시 방향을 알고 있어야 하는 존재로 전제한다.
이제는 대학의 이름만으로는 부족하고, 포트폴리오와 대외 활동까지 중요하다는 말이 나온다. 일찍부터 하고 싶은 것을 알고 준비한 사람이 유리하다는 말은 어느새 ‘늦으면 안 된다’는 압박이 됐다. ‘하고 싶은 게 없다’고 말하는 청년들이 실제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분명 무언가를 시작했고, 그만뒀고, 관심 가는 쪽으로 한 걸음 옮겼다. 다만 그것을 하나의 방향으로 정리해 설명하지 못할 뿐이다. 청년들을 옥죄는 것은 방향의 부재가 아니다. 아직 설명할 수 없는 방향마저 당장 증명해 내야 한다는 가혹한 요구다.
사막에서 낙타는 물을 찾아 걷는다. 정확히 말하면 이때 낙타가 좇는 것은 물 냄새가 아니라, 비 온 뒤 흙에서 나는 냄새인 ‘지오스민’이다. 물이 있다는 증거가 아니라, 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단서다. 임선우 작가의 소설 ‘초록 고래가 있는 방’에는 이와 닮은 대화가 나온다. ‘계속 걸어도 물이 나오지 않는다면요?’라는 질문에 상대는 이렇게 답한다. ‘살아 있는 한, 최대한 물에 가까워지게 걷는 거죠.’
물이 있을 거라는 확신이 아니라, 물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감각만으로 걷는 것. 지금의 청년들에게 허락돼야 할 것은 바로 이런 감각이다. 이상하게 마음이 가는 일, 한 번 더 해보고 싶은 일. 그것들이 반드시 당장 가야 할 길은 아니다. 그래도 우리는 그 단서들을 따라 한 걸음씩 발을 옮겨볼 수 있다.
사막에서는 발자국도 바람이 불면 지워진다. 어디까지 왔는지 증명할 방법이 없다. 지금 당장 하고 싶은 것이 없어 막막한 사람에게 말해주고 싶다. 어디쯤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 설명하지 못해도 괜찮다고. 우리는 살아 있는 한 우리가 바라는 것과 가까워지고 있다.
이정연 기자 dlwjddus@dankook.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