끌려가는 나라 아닌 판을 움직이는 국가로

2026-09-15     이은재 무역학과 교수

 

“미국 믿지 말고, 소련 속지 말고, 일본 일어나고 중국 되돌아온다. 조선사람 조심하라!” 해방 직후 한반도에 유행한 이 풍문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현실을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오늘날 한국은 최빈국에서 세계적 무역·제조·국방 강국으로 성장했다. 반도체와 첨단 제조업, 국방과학기술에 이어 한류를 앞세운 문화적 영향력까지 갖춘 중추 국가로 자리 잡았지만, 높은 대외의존도와 개방형 무역구조로 인해 여전히 강대국의 패권 경쟁에 직접 노출돼 있다. 따라서 강대국의 선의에 기대기보다 경제·기술·안보의 전략적 자산을 스스로 확보해야 한다.

 

우선 글로벌 공급망에서 한국의 부재가 첨단산업 전체에 영향을 미칠 만큼 중요한 ‘핵심 고리’를 확보해야 한다. 반도체와 고성능 메모리, 이차전지 핵심 소재 분야에서 경쟁국보다 기술 격차를 유지한다면 한국의 기술과 부품 공급 자체가 경제 안보의 협상력이 된다. 동시에 미중 의존도를 낮추고 아시아·중동·EU 등으로 협력 기반을 다변화해야 한다. 미국과는 안보·첨단기술·현지투자를, 중국과는 원자재 공급망과 소비시장 중심의 실용적 협력을 이어갈 필요가 있다.

 

안보 역시 한미동맹을 축으로 하되 독자적 억제력을 갖춰야 한다. 북·러 군사협력, 중국의 군사적 영향력 확대, 북·미 직접 협상 등에 대비해 정찰위성·미사일 방어 등을 강화해야 한다. K-방산의 생산력도 국가안보와 외교 협상력을 뒷받침하는 전략 자산이 될 수 있다.

 

외교에서는 이념보다 국익 중심의 전략적 실용주의가 중요하다. 한미일 경제 안보 협력에는 참여하되 독도와 과거사 등 주권 문제에는 원칙적으로 대응하고, 중국과도 희토류·요소수 등 필요한 분야에서는 협력해야 한다.

 

80년 전의 풍문이 주는 교훈은 분명하다. 어떤 강대국도 자국의 이익보다 한국의 안위를 우선하지 않는다. 한국은 선택을 강요받는 국가가 아니라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국가가 돼야 한다. 대외적으로 주도적인 통상·외교 공간을 확보하고, 대내적으로는 양극화와 사회 갈등을 완화해 국가 역량을 결집하는 것. 이것이 패권 경쟁이 격화되는 21세기 국제질서에서 대한민국의 국익과 경제 안보를 지키는 핵심 전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