⑫ 한국의 근대화
근대화시대의 이념적 지도자와 실천적 지도자
1960년 10월에 발간된 미국의 권위지인 포린 어페어즈(Foreign Affairs)는 당시의 한국경제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실업자 수는 노동인구의 25%, 1960년의 국민 1인당 GNP는 100$ 이하이고, 전력산출량은 멕시코의 6분의 1, 수출은 200만 달러, 수입은 2억 달러, 이래서 한국의 경제적 기적의 가능성은 전혀 없다. 한국에 대한 미국 측 원조계획의 가장 실망적인 국면은, 원조계획이 생활수준 향상을 지속할 만한 성장을 가져 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 경제성장의 조건은 북한이 남한보다 순조로운 상태에 있다 - 결국 한국인들이 직면한 선택은 워싱턴이냐, 모스크바냐가 아니라 서울이냐, 평양이냐 하는 것이다.」이 비참했던 현실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현실은 경제적 빈곤과 침체 속에서 북쪽의 적화통일전략의 함정에 빠질 수 있는 일대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삼권분립이 있고, 지나칠 정도로 정부를 비판하는 국회와 언론이 있고, 학생데모가 끊이지 않는 나라를 독재국가라고 하는 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그래서 외국의 학자들은 박정희정권을 독재정권이라고 하지 않고 「권위주의 정권」이라고 부르고 있다. 권위주의 정권하에서 인권유린, 정치적 탄압 등의 정치적 폐단이 일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대통령은 그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그로 인해 후일에 비난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라고 했다. 그러나 그의 철석같은 신념과 강력한 리더십이 있었기에 오늘날 한국의 경제개발과 근대화가 가능했다고 보는 것이 내외의 중론이다. 박정희 정권을 독재정권의 전횡(專橫)으로만 보았다면 21C 미국의 동반자인 중국, 아세안 제국가, 아프리카의 개도국 등에서 「한국의 발전모델」「박정희 식 개발모델」을 앞다투어 배우고 있겠는가.
지도자에게는 동지와 적이 있다. 동지와 적의 구분이 불행하게도 국가의 백년대계가 아닌 개인 이득의 호·불호간에 미화되거나 매도되는 게 일반적이다. 역사는 이를 준엄하게 심판할 것이다. 우리는 지도자의 양면을 균형 있게 판단하고 거기에서 교훈을 얻도록 하여야 한다. 지도자는 「이념적 지도자」와 「실천적 지도자」로 구별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이념적 지도자는 백범김구, 도산 안창호 등을 들 수 있다. 실천적 지도자로서는 물론 우남 이승만, 박정희 두 대통령을 들 수 있다. 이념적 지도자는 현실을 비판하고 이상을 드높인다. 그러나 실천적 지도자는 이념을 현실에 적용하려 할 때에 엄청난 난관에 부딪히고 때로는 그 이념에 반하는 행동이 강요되는 경우도 있다. 영국의 크롬웰이 그 좋은 예이다. 크롬웰은 국왕의 전제주의와 왕당파와의 치열한 전쟁에서 영국의 의회주의를 승리로 이끈 영웅이다. 그는 국왕 찰스 1세(Charles I, 1600 ~ 1649)의 처형, 왕정의 폐지, 귀족원의 폐지, 공화국 선언 등으로 영국의 의회 민주화를 실현했다.
그러나 크롬웰이 1658년에 병사하자, 찰스 2세(Charles II, 1630 ~ 1685)가 왕정을 복구하고, 그의 부왕을 처형한 보복으로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매장된 그의 시신을 파내 효수(梟首)형에 처했다. 대영백과사전은 크롬웰에 대해「그는 영국을 위대한 나라로 만들었고 그의 치적에는 질서의 확립, 경제의 재건, 종교적 관용의 실현, 교육기회의 확대, 사회정의의 실현 등」이 포함되어 기술하고 있다.
하버드 대학교 경제학과의 배로(Robert Barro)교수는 「민주주의는 성장의 처방일 수 있는가?(Democracy : a Recipe for Growth?)」라는 1994년의 논문에서 「개발초기에 있어서의 민주화 정책은 성장의 걸림돌」만 되었다고 단언하였고, 즉 개발독재는 개발초기의 한시적 체제였지만 민주화를 위한 사회경제적 기반조성기였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렇게 보았을 때 체제의 안정성과 정책의 신뢰성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산업화 초기단계에서 권위주의체제는 한시적인 필요악이었다고 할 수 있다. 동일한 맥락에서 박정희 시대는 「민주화의 암흑기」가 아니라 「민주화를 위한 사회경제적 기반조성기」였다 할 것이다.
시간과 세대가 지나면, 바라건대 박정희에 대한 보다 균형 잡힌 평가가 이루어질 것이며 그의 권위적인 면과 과다한 통치를 인정하면서도 한편 그의 위대한 공적인 「한국의 근대화」에 대해 경의를 표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