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의 영혼]
32)공간에 펼쳐지는 ‘계획’이란 무엇인가. (1부 ‘문제제기’)

(아우슈비츠를 중심으로)

2009-11-19     이원상(도시계획·부동산·05졸) 한국토지주택공사 주

아우슈비츠 이후 예술은 어디로 갔나
2차 대전이 끝난 후 서구의 지성은 아우슈비츠 앞에서 절망했다


특정 민족을 색출해 눈에
보이지 않게 하려면 얼마나
치밀한 계산이 있어야 할까


고민을 빌린 접근 1:우회하여

만일 예술이라는 것이 비평가들이 구획 짓는 어떤 카테고리들의 지형들을 무력화시키고 문학이론으로도 잡히지 않는 동시에 시간을 초월하여 어떤 영감의 원천으로서 기능한다면 ‘아우슈비츠’(Auschwitz)가 예술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간이므로!!

독일의 아도르노는 묻는다. “아우슈비츠 이후 예술은 어디로 가느냐”고.
잠시 나의 기분을 말하는 것이 죄가 되지 않는다면 난 그것에서 마취의 기운에 사로잡힌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에 대해서 말을 한다. 그러나 조심스럽다. 왜일까. 죄책감 때문에, 아니면 어떤 비장과 숭고가 있어서. 아니다. 그것은 아우슈비츠의 생존자가 아직 살아있기 때문이다. 이 시대를 고민하는 예술가라면 아우슈비츠는 고통의 대상이다. 서구사회의 지성은 2차대전이 끝난 후 아우슈비츠 앞에서 절망했다. 이후 전범재판을 통해 학살 책임자(들)을 그(들)가 권세를 부리던 바로 그 곳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리고 이같은 일이 다시는 벌어지지 말자는 뜻에서 그 단두대는 치워지지 않았다. 그러나 서구 지성은 ’92 - ’93 보스니아에게 침묵했다. 자본논리란 돈이 되지 않는 곳에는 발을 들이지 않는 법이다.

접근 2:1942년 반제회의에서 시작하는 야만의 계획 

계획이라는 알 수 없는 개념에 접근해 들어가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란 그것의 영향, 그것의 실체를 적용했을 때 드러나는 그 파장의 범위를 살펴봄으로써 계획이 가지고 있는 의미에 한 발 다가가는 것이다. 이를 통해 그것의 정체를 다시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말한다. 계획은 미래지향적이며, 목적달성을 위한 행동의 절차이자, 미래 행동에 대한 통제라고. 그렇다면 아래와 같은 문제를 살펴보자.

유럽의 한 정부에서 서부와 동부 유럽을 아우르는 거대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 중에 특정 민족을 색출하여 눈에 보이지 않게 하고자 한다면 이것은 얼마나 치밀한 계산이 있어야 할까.
독일 제3제국의 어느 회의록의 한 부분이다.(Wolfgang Benz의 Holocaust 발췌)

“담당 부서의 관할 하에, 현재 최종 해결 도상에 있는 유대인들을 적절한 방식으로 동부에서의 강제 노동에 투입해야만 한다. (중략) 도로를 건설하는 일에 투입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레 쇠약해져 쓰러질 것이 뻔하다. 만일에 끝까지 버텨 내는 사람들이 있을 경우, 그들이야말로 분명 저항력이 가장 큰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에 따른 “적절한 조치”가 취해져야만 한다. 이들은 유대인 재건을 위한 맹아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적절한 조치는 물론 “절멸”(絶滅)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독일 나치의 유대인 정책은 이처럼 자명한 것이었다. 공식적으로 ‘차관회의’라고 불리었고, 일반적으로 ‘반제회의’라고 하는 1942년 1월의 모임은 인류의 야만을 날것으로 안건 상정한 날이기도 하다. 이것이 시작이다. 그곳에는 내무성, 법무성, 나치당 대표 비서실, 외무성, 전시 경제를 위한 4개년 계획 담당청 등을 대표하는 관리들이 참석했으며 억압단체 게시타포 소속 친위대 간부들이 초청되었다. 국가적 규모의 회동에서 국가의 정책목표 중 하나로 부상할 순수 게르만의 혈통유지 정책의 핵심 쟁점으로 유대인의 제거가 부각된 것이다.

공간에 펼쳐지는 ‘계획’이란 이처럼 다차원의 문제를 포괄한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공간에 집행되어질 계획을 탐사할 것이다. 숨을 죽인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