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민으로서 최초로 한국 국적 취득한 아브라함(정책경영대학원 석사 4학기)원우

“자유와 평화 속에 살 수 있어 행복합니다”

2010-03-30     김상천 기자

난민으로서 최초로 한국 국적 취득한 아브라함(정책경영대학원 석사 4학기)원우

“자유와 평화 속에 살 수 있어 행복합니다”


19일 경기 과천시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에서 ‘한국인’ 아브라함(가명)씨는 해맑게 웃었다. 아브라함씨는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 국립대학 재학 중 군부독재정권에 항거한 반정부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경찰의 수배를 받았다. 2001년 8월 에티오피아 정부의 대규모 검거령을 피해 한국으로 망명한 그는, 이듬해 고국의 정치적 박해를 이유로 난민 인정 신청을 했다. 법무부는 2005년 9월 "에티오피아 정부가 야당 및 학생들의 반정부 활동을 탄압하고 있으며, 본국 귀국 시 박해를 받을 위험성이 있다”고 판단, 난민 인정 신청을 받아들였다. 한 교수의 소개로 자동차 부품을 수출하는 중소기업에 입사한 그는, 현재 경영기획부 차장으로 일하고 있다. 그동안 차곡차곡 모은 월급으로 천안에 본인 명의의 집도 장만하였고, 국내 신학대학 강사인 같은 나라 출신의 여성과 결혼해 다섯 살짜리 딸을 키우고 있다. 호서대학교에 편입해 신학을 공부한 그는 현재 단국대학교 천안캠퍼스 정책경영대학원에 재학 중이다. 아브라함씨는 지난해 3월 한국인으로 살기 위해 귀화를 신청했다. 법무부는 귀화적격심사를 실시한 결과, 아브라함씨의 생계유지능력과 기본 소양 등이 모두 우수하다고 판단, 1년 6개월인 프로그램 이수 예상 기간보다 빠른 1년 만에 그의 귀화를 허가했다. 1992년 난민협약에 가입한 이후 난민 인정자에게 한국 국적을 부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며, 아시아 국가 중에서 이전에 난민에게 국적(시민권)을 준 국가는 필리핀이 유일하다 <편집자주>

 

 

▲난민 인정자로서는 최초로 한국인이 되었다. 전례가 없었던 만큼 많은 어려움이 따랐을 것 같다.
어려운 일을 해냈다고 생각합니다. 외국인이 한국의 문화와 언어를 국가가 인정하는 만큼 이해하기란 굉장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일인 것 같습니다. 난민의 귀화시험 기준은 한국에 상주하는 80여 만 명의 외국인들과 똑같기는 합니다만, 일반 외국인에 비해 난민의 경우 귀화 인정을 받기가 더 어려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통 1년 6개월이 걸리는 귀화 프로그램을 1년 만에 이수했다는 사실에 더욱 기쁩니다. 타국에서 온 저를 친절하고 따뜻하게 대해준 한국 사람들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마음씨 따뜻한 사람들이 있었기에 지금껏 특별히 큰 어려움 없이 잘 지내올 수 있었습니다. 어떤 나라들의 경우에는 난민들은 반드시 난민캠프에만 모여 살게끔 법으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난민도 일반 한국 국민과 동등한 대접을 받는 자유의 나라입니다. 2001년 8월 처음 한국에 온 뒤로 지금까지 자신의 의지대로 자유와 평화를 누리며 살 수 있다는 사실에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에티오피아 제 1의 대학인 아디스아바바대를 졸업하고, 모교의 연구원으로 활동하는 등의 안정적인 삶을 포기하면서까지 반정부 운동을 주도하고, 망명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에티오피아 독재 정부의 극심한 억압과 수탈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에티오피아에서 기본적인 인권 및 사회권조차 누릴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심지어 집 밖에 나가는 것조차 제한 받습니다. 한국도 1960년대 일제강점기의 아픈 역사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에티오피아의 상황은 어떤 면에서는 그보다 더 심각하다고 할 수 있어요. 한국은 한민족 국가라는 점에서 자유를 되찾기 위한 단합이 비교적 수월했지만 에티오피아는 그렇지가 못합니다. 약 80개 부족이 있고 제각각의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정부의 독재에 반하여 뭉쳐 일어나기가 힘든 실정입니다. 에티오피아 정부는 그러한 점을 악용해 부당하게 국민들의 재산을 착취하고, 소수 종족 우대정책과 집권당의 장기집권을 자행하며 온갖 악행을 저질러 왔습니다.

 


▲에티오피아의 정부의 만행은 어떤 수준이었나요?
집권당의 장기 독재로 인한 문제는 끝없는 고난의 악순환이며 지금도 심각한 상황입니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수 천 명이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정부는 기아에 허덕이는 국민들을 등한시하고 다른 나라에서 원조 받은 지원금으로 무기를 사들여 소말리아 같은 주변 약소국을 침략합니다. 소말리아와 에티오피아는 오랜 역사를 함께 잘 지내왔는데 대체 왜 그들에게 총을 쏘고 그들의 물건을 빼앗는지 정말 이해할 수 없어요. 또한 사회주의 정책을 실시하여 강제로 국민들의 재산을 빼앗고 엄청난 액수의 세금을 부과합니다. 200만원 상당의 승용차에 3000만원의 세금을 물릴 정도죠. 그러나 그보다 심각한 것은 마음대로 움직일 수조차 없다는 사실입니다. 군인들은 사람들이 모여 있기만 해도 테러나 데모로 간주하고 총을 쏴서 죽입니다. 마음대로 집밖에 나갈 수조차 없어요. 사회 곳곳에 정부의 스파이들이 심어져 있어 민주화 운동을 위한 발판을 만들기도 쉽지 않습니다.

 


▲망명 국가로 한국을 택한 이유가 있나요?
만약 건물 안에 있는데, 1층에서 불이 나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구조를 요청하고, 창문으로 뛰어내리고, 모두 저마다 가장 빠른 방법으로 탈출하겠죠. 반정부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경찰에게 쫒기고 있을 때, 에티오피아에 있던 일본인 친구가 한국으로 도망칠 수 있도록 서류를 준비해 줬어요. 한국은 어학연수 비자가 가장 빨리 나오는 나라였습니다. 한국에서의 처음 2년간은 선문대학교 어학당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한국어를 배웠습니다. 안전이 보장되고 자신의 신념대로 복종 없이 살 수 있는 삶이 너무 행복했습니다.

 
▲한국의 문화나 생활양식에 적응하기가 어렵지 않았나요?
선문대 어학당 기숙사에는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친구들이 많은 것을 알려주고 도와줬습니다. 그래서 적응하기가 특별히 어렵지는 않았어요. 기숙사 생활을 한 탓에 외로움도 덜 수 있었던 것 같네요. 또한 한국 학생들도 친절하게 대해줬습니다. 저는 한국은 인종차별이 없는 순수한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 생활한지 9년 7개월째인 지금까지, 한 번도 인종차별을 느낀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인종차별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것들 중에는, 외국인들이 한국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부족해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적극적인 자세로 한국을 알려고 노력하기만 하면 한국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따뜻하게 대해주곤 했습니다. 누가 인종차별을 겪었다고 말하면 저에게 소개시켜 주세요. 제가 그 사람과 토론해보겠습니다. (웃음)


▲우리 대학교와는 어떤 인연이 있나요?
호서대학교 신학과를 졸업 후 2년 뒤, 경영학을 공부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어요. 단국대학교가 유명하고 직장이 있는 아산에서도 가까워 단국대학교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싶었습니다. 무작정 학과 사무실로 들어가서 “여기서 공부하고 싶으니 나를 좀 뽑아주면 안 되겠냐”고 했더니 지금의 지도 교수님이신 임상혁 교수님과의 면접을 주선해줬어요. 교수님께 “열심히 공부하면 우리(학교측)도 최대한 도와주겠다”는 말을 들어서 정말 너무 기뻤습니다. 단국대 정책경영대학원 교수님들은 능력이 대단하신 분들입니다. 높은 수업 수준에 매우 만족하고 있어요.

▲앞으로의 어떤 계획이 있나요?
지금 대학원 4학기를 수료중인데, 일단은 내년 2월에 졸업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꼭 졸업시험에 합격했으면 좋겠어요. 아, 그리고 일단 한국 이름부터 지어야겠습니다. (웃음)

 

김상천 수습기자 firestarter@dankook.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