敎育救國의 길을 걷다
敎育救國의 길을 걷다
  • 권용우<명예교수·법학>
  • 승인 2012.07.17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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敎育救國의 길을 걷다

 

권 용 우

<명예교수 ‧ 법학>

 

1891년 10월 21일, 이 날은 평생 교육구국(敎育救國)의 길을 걸었던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 선생이 태어난 날이다. 그는 전라북도 고창군(高敞郡) 부안면(富安面)에서 태어났다. 아호 ‘인촌’은 그가 태어난 인촌리(仁村里)에서 빈 것이다.

 

敎育을 통한 國權回復의 필요성 깨달아

 

1894년 갑오경장(甲午更張)을 거치면서 교육제도의 일대 개혁이 이루어졌는데, 국정개혁(國政改革)에 있어서 무엇보다 시급한 것이 인재(人才)의 양성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 2월에 ‘교육입국조서’(敎育立國詔書)가 반포되면서 각급 학교의 설립이 본격화되었다.

그 첫 번 째로 손꼽히는 것이 1895년 4월 한성사범학교(漢城師範學校)가 정부에 의해서 설립되었는데, 이것이 근대교육기관의 시작이었다. 그 뒤, 교육의 필요성을 깨달은 선각자들에 의한 사립학교의 설립이 이어졌다. 1898년 민영환(閔泳煥)이 흥화학교(興化學校)를, 1899년 안창호(安昌浩)가 점진학교(漸進學校)를 설립하여 교육구국을 실천에 옮겼다.

그 후, 1905년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 체결된 이후 교육을 통한 국권회복(國權回復)의 필요성이 고조되면서 전국에 걸쳐 많은 학교가 설립되었다.

특히, 3 ‧ 1 독립운동이 있은 후, 민족주의(民族主義) 진영의 지도인사들은 급진적인 항일투쟁방식으로는 독립을 달성할 수 없다고 인식하면서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말하자면, 민족교육(民族敎育)의 시급함을 깨닫고 ‘교육구국운동’(敎育救國運動)으로의 방향전환을 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인촌 김성수였다. 그는 일본 와세다(早稻田)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해서 교육구국을 위해서 학교의 설립을 계획하고 있을 즈음, 중앙학교(中央學校)가 경영난에 빠져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1917년 3월 이 학교를 인수하여 교장에 취임한다. 그리고, 인촌은 중앙학교를 민족운동의 요람지로 활용하고자 하였으며, 민족지도자의 양성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인촌은 중앙학교 사택에서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 ‧ 기당(幾堂) 현상윤(玄相允) 등과 만나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면서, 독립운동의 뜻을 키워갔다. 이러한 나날을 보내면서, 인촌은 교육을 통한 인재양성이 곧 조국의 독립이라는 생각을 잠시도 잊지 않았다.

 

普成專門學校를 인수하다

 

또, 인촌은 1932년 3월에는 보성(普成) 전문학교를 인수하여 교육구국에 온 힘을 쏟는다. 이는 일제(日帝)의 탄압에서 벗어나는 길은 교육을 일으켜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는 인촌 김성수의 철학에 바탕한 것이었다.

보성전문학교는 1905년 이용익(李容翊)에 의하여 설립되었다. 1904년 2월, 러 ‧ 일 두 나라의 갈등에 휘말려 일본에 강제로 끌러가게 된 이용익은 일본이 개화된 모습에 큰 자극을 받게 된다. 그리고, 문물(文物)이 뒤떨어진 조국을 머리에 떠올리면서 ‘구국의 길은 다름 아닌 교육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교육구국의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이용익은 귀국 후, 교육의 힘만이 조국을 일으킬 수 있다는 생각에서 교육구국의 길에 뛰어들게 된다. 보성전문학교의 설립은 이러한 배경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렇게 설립된 보성전문학교는 인촌의 손에 의해서 민족의 대학, 고려대학교(高麗大學校)로 성장 ‧ 발전해 오늘에 이르렀다. 100여년의 역사를 이어오면서 얼마나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는가. 고려대학교와 인촌, 인촌과 기당의 만남은 오늘의 고려대학교를 있게 한 초석이 되었다.

 

인촌은 교육을 통해서 인재를 양성하고, 생산사업으로 민족자본을 형성하고, 그리고 언론창달을 통해 민중계몽에 온 힘을 쏟았다. 그는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이 세 가지의 위업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조국의 번영을 이루기를 바랬다.

중앙학교를 인수하고 나서 얼마 뒤의 일이다. 인촌은 “2천만 한민족(韓民族)에게 입힐 광목을 짜내자”며, 방직공장 설립을 추진했다. ‘한국 땅에서 태어나 이 땅에서 나는 곡식을 먹으며, 어찌 일본 사람이 짠 광목으로 옷을 해 입으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래서 1919년 9월 5일, 경성방직회사(京城紡織會社)를 설립하고 ‘태극성’(太極星) 상표의 광목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우리 민족의 힘으로 생산한 ‘최초의 옷감’이었다. 그리고, 상표 ‘태극성’은 민족기업을 상징하는 의미였다(李熙昇 自敍傳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에서).

이 때, 동아일보(東亞日報)의 창간을 보게 된다. 1920년 4월 1일이었다. 동아일보는 일본의 한국에 대한 유화정책을 쓰게 되면서 민간지의 발행을 허가하게 됨으로써 조선일보(朝鮮日報) ‧ 시사신문(時事新聞)과 함께 창간된 3대 민간지였다.

동아일보의 창간호 1면 머리에 실린 창간사 ‘주지(主旨)를 선명(宣明)하노라’를 읽으면 힘이 솟구친다. “조선민중(朝鮮民衆)의 표현기관(表現機關)으로 자임하노라” “민주주의(民主主義)를 지지하노라” “문화주의(文化主義)를 제창하노라”를 3대 주지로 삼고 거보(巨步)를 내딛었다.

동아일보는 단순히 읽을 거리를 전달하는 신문이 아니었다. 때로는 물산장려운동(物産獎勵運動)에 앞장서기도 하고, 때로는 문맹퇴치활동(文盲退治活動)을 통해서 범국민적인 민중운동(民衆運動)을 전개하였다. 1931년 ‘브 나로드’(Vnarod : 민중 속으로)운동은 이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인촌 김성수! 그는 우리 민족의 등불이었다. 평생을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신조로 살아오면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교육구국의 길을 걸어왔다. 이제 그를 가까이에서 대할 수는 없지만 그가 심어놓은 민족혼(民族魂)은 우리의 가슴에 자리잡고 있지 않는가. 경건한 마음으로 그의 명복(冥福)을 빈다.

권용우<명예교수·법학>
권용우<명예교수·법학>

 dknew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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