徐載弼, 獨立協會를 설립하다

권용우l승인2014.06.30l0호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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徐載弼, 獨立協會를 설립하다

 

 

권용우

(명예교수 법학)

 

 

1896(高宗 33) 72. 이 날은 서재필(徐載弼)이 중심이 되어 국가의 독립과 민족의 자립을 표방하고, 독립협회(獨立協會)를 조직한 날이다.

 

 

自主獨立旗幟를 높이 들다

 

 

독립협회의 설립에는 서재필을 비롯해서 이상재(李商在) 이승만(李承晩) 윤치호(尹致昊) 이동녕(李東寧) 남궁억(南宮檍) 등이 참여하였는데, 설립 당시에는 범국민적으로 회원을 망라하였다. 따라서, 친청(親淸) 친로(親露) 친일(親日)을 가리지 않았으며, 정부의 고관(高官)들도 참여하였다.

독립협회는 청() 나라 사신(使臣)을 영접하던 모화관(慕華館)을 인수하여 이를 개축, 독립관(獨立館)으로 문을 열었다. 그리고, 영은문(迎恩門) 자리에 독립문(獨立門)을 세우고, 독립정신의 상징으로 삼았다. 독립문은 파리(Paris)의 개선문(凱旋門)을 모델로 하여 18961121일에 기공하였으며, 18971120일에 준공되었다. 그런데, 독립문은 그 동안 일반인의 통행이 제한되어왔는데, 서울특별시가 서대문독립공원 재조성사업을 통해서 20091028일부터 일반인들에게 개방됨으로써 옛날을 되새겨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독립협회는 47일에 창간된 독립신문(獨立新聞)과 짝을 이루어 민중을 계몽하고, 애국사상(愛國思想)을 고취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독립협회는 지금까지 타율적으로 진행돼오던 근대화를 지양하고, 자율적인 근대화의 기치를 높이 올렸다. 1897829일이 그 시발점이었다. 이 날부터 정기적으로 매주 일요일에 토론회를 개최함으로써 민중의 계몽에 힘썼다. 그리고, 1898221일에는 회원 135명이 독립관(獨立館)에서 국국운동(救國運動)에 앞장 설 것을 선언하였으며, 310일에는 자주국권운동(自主國權運動)을 전개하기 위하여 서울 종로 네거리에서 제1차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개최하여 민중들의 지지를 얻었다.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민중대회였는데, 이 날 집회에는 1만여명의 민중이 참석하였다고 하니,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1029일에 개최한 만민공동회에서는 외국인에게 의존하지 말고 관민(官民)이 힘을 합쳐 황권(皇權)을 공고히 할 것등의 6개항의 개혁안을 결의하고, 이를 상주(上奏)하였다(李瑄根 大韓國史 8).

 

 

서재필은 독립협회를 통해서 일반대중들의 정치의식을 일깨우고, 지식인들로 하여금 근대적인 자아의식을 심어주려고 부단히 노력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을 통해서 근대적 자주국가(自主國家)의 수립을 위한 이념적 기반을 다져나갔다.

이러한 활동을 펴나가는 독립협회는 민중들의 지지를 얻어 나날이 회원수가 늘어났는데, 189811월에는 4,000여명으로 늘어났으며, 그 조직망을 지방으로 확대하였다. 1898년 공주지회(公州支會)를 시작으로 평양(平壤) 대구(大邱)로 이어졌다.

이처럼 독립협회가 세력을 확대해가자 이 세력을 누르려는 단체가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18987월에 조직된 황국협회(皇國協會)였는데, 이는 황실(皇室)을 수호한다는 뜻에서 만들어진 어용단체(御用團體)였다. 독립협회는 이러한 단체의 선동 모략에 의하여 1899년초에 해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독립협회의 정신은 그 뒤에도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 대한협회(大韓協會)로 이어졌다.

 

 

民族先覺者, 徐載弼

 

 

송재(松齋) 서재필. 그는 186417(음력 18631128) 외가(外家)인 전라남도 보성(寶城)에서 서광언(徐光彦)41녀 중 2남으로 태어났다. 그리고, 여덟 살 되던 1871년에 충청남도 대덕(大德)의 재당숙 서광하(徐光夏)의 양자로 들어갔으며, 곧 상경하여 외삼촌인 김성근(金聲根)의 집에서 한학(漢學)을 공부하였다. 김성근은 안동김씨(安東金氏)의 후예로 도승지 전라도관찰사 이조판서 예조판서를 지낸 인물이었다.

이 무렵, 김옥균(金玉均) 서광법(徐光範) 홍영식(洪英植) 박영효(朴泳孝) 등 개화파 인사들과 교유하면서 개화사상(開化思想)을 접하게 되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1884124일 김옥균이 주도한 갑신정변(甲申政變)에 가담하게 되었다. 여기 갑신정변이란 낡은 봉건체제(封建體制)의 틀을 깨뜨리고, 새로운 서구문물(西歐文物)을 받아들여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목표로 일으킨 정변이다. 갑신정변은 우정국(郵政局) 낙성식 축하연을 기회로 하여 수구파(守舊派) 인사들을 척살하고, () 나라의 간섭을 끊고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려는 목표였다. 그리하여, 우정국 인근 별궁(別宮)의 방화를 신호로 하여 정변의 막이 올랐으나, 126일 청군(淸軍)을 앞세운 수구파가 고종(高宗)이 머물고 있는 창덕궁(昌德宮)을 공격해오자 수비를 약속했던 일본이 약속을 어기고 철병함으로써 청군을 막을 길이 없었다. 이로써 정변은 ‘3일천하’(三一天下)로 끝나고 말았다.

 

 

서재필은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나자 서광범 박영효 등과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 1885611일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에 도착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육체적 노동을 하면서 틈틈이 영어를 익혔다. 그리고, 1888년 워싱톤(Washington D.C.)으로 이주하여 육군 의학도서관에서 일하면서 컬럼비안대학(조지워싱턴대학교 전신)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그는 18933월에 소정의 과정을 마치고,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미국에서 의학사학위(M.D.)를 취득하였다.

그 무렵, 그는 미국의 시민권을 얻는 한편 일류 병원에 좋은 일자리를 잡고 평화로운 미국생활을 하면서, 미국의 민주정치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이것이 훗날 조국에 돌아와 개화 개혁의 선두에서 일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서재필이 환국한 189512월은 국내의 사정은 참으로 어수선한 때였다. 을미사변(乙未事變) 후 일본에 대한 국민감정이 극도로 악화되었으며, 전국 각지에서 의병항쟁(義兵抗爭)이 일어났다. 그리고, 고종(高宗)은 신변의 위협을 느껴 1896211일 왕궁(王宮)을 버리고 러시아 공사관(公使館)으로 파천하여 그 곳에서 국사(國事)를 논하는 꼴이 되었다. 나라가 있으나, 껍데기뿐이었다.

 

 

서재필은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면서 대중을 계몽하고, 나라의 기틀을 잡는데 자기 한 몸을 바쳐야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된다. 그 첫 사업이 독립신문의 창간이었으며, 그 다음으로 착수한 것이 독립협회의 조직이었다.

서재필은 독립신문을 통해서 민중들에게 선진한 세계의 새로운 문명에 눈을 뜨게 하고, 그리고 자주독립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그는 그날그날의 기사와 논설을 통해서 민권사상(民權思想) 평등주의(平等主義) 민족주의(民族主義)를 제창하고,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독립신문은 독립협회와 짝을 이루어 자주 개혁의 기치를 높이들고, 조국의 갈길을 인도하였다.

서재필, 그는 조국과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위하여 일생을 바친 위대한 선각자였다. 그는 195115, 87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대한민국을 사랑한 애국자였다. 부디 천상(天上)에서 평안을 누리시옵소서!


권용우  lawkwon@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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