梁起鐸, 大韓每日申報를 창간하다
梁起鐸, 大韓每日申報를 창간하다
  • 권용우
  • 승인 2014.07.28 0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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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起鐸, 大韓每日申報를 창간하다

 

 

권용우

(명예교수 법학)

 

 

1904718, 이 날 양기탁(梁起鐸)이 영국인 베델(Bethell, E. T., 한국명 : 裵 說)과 더불어 국한문판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를 창간하였다.

베델은 영국 런던(London) 데일리 뉴스(Daily News)의 특파원으로 러 일 전쟁을 취재하기 위하여 우리나라에 입국하였는데, 양기탁과의 만남을 통해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

 

 

抗日新聞, 大韓每日申報가 태어나다

 

 

이 무렵에는 일본이 한국의 일본예속화를 위하여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강제로 체결하고, 한국에 대한 내정간섭(內政干涉)을 시작할 때였다. 그리고, 군대를 서울에 주둔시키고, 군대의 힘을 빌어 한국 국민들에게 대단히 위압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집회가 엄격하게 통제되었고 언론에 대한 검열도 몹시 심하였다.

이 때, 양기탁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영감(靈感)이 있었다. 영국인 베델을 발행인으로 앞세움으로써 일본의 검열을 피해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 베델은 우리나라에 오기 전 일본 고베(新戶)에서 무역상(貿易商) 베델 브라더스(Brothers)를 경영하면서 16년간 체류한 바 있어서 일본을 잘 알고 있는 것도 신문제작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이러한 양기탁의 판단이 대한매일신보의 창간으로 이어졋다. 대한매일신보는 창간 당시에는 타블로이드판 6면을 발행하면서, 그 중 2개면은 한글판이었고 4개면은 영문판이었다. 이듬해 811일부터는 국한문판과 영문판을 분리하여 두 개의 신문으로 발행하였는데, 영문판 제호는 The Korea Daily News였다. 그러다가, 한글과 한문을 혼용한 국한문판을 읽지 못하는 독자가 있다는 불만이 일게 됨에, 1907523일자부터는 한글판을 별도로 발행하여 국한문판 한글판, 그리고 영문판의 3종으로 확대하였다.

그리고, 나날이 사세(社勢)가 확장되어 3종의 신문을 합한 발행부수가 1만부를 넘었다고 하니, 그 당시의 최대의 신문이었다(동아원색대백과사전5)

 

 

抗日言論活動에 앞장 서다

 

 

우강(雩岡) 양기탁, 그는 187142일 평안남도 평양(平壤)에서 양시영(梁時英)의 장남으로 태어났는데, 뒷날 부친의 고향인 강서군(江西郡)으로 이주하여 이 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면서 한학(漢學)을 수학하였다.

그런데, 이 무렵은 국내의 정치상황이 참으로 어수선한 시기였다. 미국이 대()아시아 팽창주의정책을 펴면서 우리나라와 통상을 요구하는 신미양요(辛未洋擾)가 있었으며, 일본에 의한 운양호(雲揚號) 사건에 이은 강화도조약 제물포조약의 체결에 따른 압박이 조여들고 있었다. 영국 프랑스도 경쟁적으로 우리나라의 이권을 챙기려고 하였다. 이러한 와중에 188412월에는 급진개화파에 의한 갑신정변(甲申政變)으로 정치상황은 걷잡을 수 없었다.

양기택은 이러한 정치상황을 지켜보면서 자신의 할 일이 무엇인가로 골몰하게 된다. 그러던 그는 열여섯 살이 되던 1886년 서울로 올라와 한성외국어학교(漢城外國語學校)에 입학하여, 영어를 배웠다. 그리고, 나현태(羅鉉泰)에게 사사(私事)받으면서 식견을 넓혀가면서, 애국사상(愛國思想)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이 무렵, 양기탁은 종군기자(從軍記者) 베델을 만나면서 그의 새로운 꿈을 펼 기회를 갖게 되었다. 베델을 사장으로 추대하고, 거보를 내디딘 대한매일신보는 일본 헌병사령부의 검열을 받지 않고 자유로운 논조를 펼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때 논설진으로는 양기탁을 비롯하여 남궁억(南宮檍) 박은식(朴殷植) 신채호(申采浩) 등 당대의 쟁쟁한 논객들이었는데, 이들의 날카로운 논설이 우리 국민들의 가슴에 찡하게 다가갔다. 특히, 박은식과 신채호는 역사지식의 보급을 통해 독자들에게 민족주의사상(民族主義思想)을 심어주려고 노력하였다.

이로써 대한매일신보는 황성신문(皇城新聞)과 함께 항일언론으로 자리를 굳건히 했다. 그래서, 이 두 신문이 불을 토하는 듯한 논설로 일본의 침략주의를 공격하면 국민 모두가 만족한 웃음을 머금곤 했다고 한다.

조선 통감(統監) 이또오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이러한 언론의 기세를 꺾으려는 목적으로 경성일보(京城日報)를 창간하여 일본어판과 한국어판을 함께 발행했지만, 그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다.

 

 

190511, 일본에 의해서 을사늑약(乙巳勒約)이 강제로 체결되자 황성신문은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 ‘이 날에 목을 놓아 통곡하노라’)이라는 논설로, 대한매일신보는 칙어엄정(勅語嚴正) 칙약무효(勅約無效)”라는 사설로 일본의 침략을 가차없이 꾸짖었다.

이 때, 대한매일신보의 보도는 거침이 없었다. 일제(日帝)의 침략과 내각(內閣)의 친일국정(親日國政)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신속한 보도로 응어리진 한국 국민들의 가슴을 시원하게 열어주었다. 그리고, 대한매일신보는 19074월 민족운동의 요람인 신민회(新民會)가 결성된 후에는 그 기관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신민회는 을사늑약에 의하여 일본이 우리의 외교권(外交權)을 박탈함으로써 종래와 같은 계몽주의적인 온건한 방법에 의한 독립운동방략이 실효를 거둘 수 없게 되었으므로, 새로운 비밀결사(秘密結社)의 필요에 의해서 결성된 단체였다. 따라서, 신민회의 역할은 국권회복(國權回復)을 위한 전진기지였는데, 대한매일신보와 짝을 이루어 항일운동을 전개해나갔다.

, 대한매일신보는 19071월부터 시작된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에도 적극적이었다. 이 중심에 양기탁이 있었다. 여기 국채보상운동이란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빌린 국채(國債) 1,300만원을 갚기 위하여 2천만 국민이 담배를 끊고 절약한 돈으로 이를 상환하여 국권(國權)을 회복하자는 민중운동 구국운동이었다. 190748, 대한매일신보는 사내에 국채보상금총합소를 설치하고, 전국 각지로부터의 지원금을 수납하였다.

 

 

이러는 동안 대한매일신보는 적지 않은 수난을 겪었다. 일제의 탄압으로 발행인 겸 편집인 베델이 수차례 재판에 회부되기도 하고, 국채보상금 횡령혐의를 씌어 양기탁을 구속하였다. 이 모두가 대한매일신보를 지켜내기 위한 고난의 연속이었다.

1908527, 영국인 만함(Manrnham, A. W.)이 발행인 겸 편집인을 맡았다가, 190951일에 베델이 사망하면서 만함이 대한매일신보의 실질적인 소유자가 되었다.

1910614, 이 날은 참으로 애석한 일을 맞게 되었다. 그 때까지 항일구국운동의 마지막 보류인 대한매일신보가 통감부로 넘어가고 말았다. 만함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이제 더 이상 불을 토하는 항일논설을 읽을 기회가 없어지고 말았다. 이를 지켜본 양기탁, 그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권용우
권용우

 lawkwon@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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