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光復節을 맞는다
또 光復節을 맞는다
  • 권용우
  • 승인 2014.08.11 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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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復節을 맞는다

 

 

권용우

(명예교수 법학)

 

 

오는 15일은 예순아홉번 째로 맞는 광복절(光復節)이다. 1945815. 이 날은 우리 민족이 마침내 35년간 일본의 무단정치(武斷政治)의 질곡(桎梏)에서 벗어난 뜻 깊은 날이다.

 

 

日王 裕仁, 無條件 항복하다

 

 

한국의 독립이 국제적으로 논의된 것은 1943121일에 발표된 카이로선언(Cairo Declaration)에서였다. 이 선언은 대일전(對日戰)의 기본목적에 관한 미국 영국 중국 3국의 정상(頂上)들이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서 회담을 개최하고, ‘2차 세계대전 종전(終戰) 후 일본의 영토에 대한 처리문제를 논의하는 과정에 한국에 대한 특별조항으로 한국의 독립을 결정함으로써 한국의 독립이 국제적으로 보장되게 되었다.

그리고, 19457월에 있은 포츠담선언(Potsdam Declaration)에서는 일본의 무조건 항복 군국주의(軍國主義)의 제거 강점한 영토의 반환 전범자(戰犯者)의 처벌 등을 담고 있었으며, 특히 이 선언 제8조에서 카이로선언의 모든 조항은 이행되어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일본의 주권은 혼슈우(本州) 홋카이도(北海道) 규슈(九州) 시고쿠(四國)와 연합국이 결정하는 작은 섬들에 국한될 것으로 명시하여, 카이로선언에서 결정된 한국의 독립이 재확인되었다.

 

 

그런데, 일본의 패망은 이미 1942418일에 그 조짐이 들어났다. 이 날 미국의 B25 비행기 8대가 일본 전역을 누비며 포격을 퍼부었다. 도오꾜(東京) 요꼬하마(橫濱) 가와자끼(川崎) 요꼬스까(橫須賀) 나고야(名古屋) 고오베(神戶) 등 여러 도시가 포격으로 공포에 휩싸였다.

, 일본군이 350척의 대병력으로 하와이군도(Hawaii群島) 서쪽에 위치한 미드웨이(Midway) 미군기지(美軍基地)의 섬멸작전에 총력을 기울였지만, 실패로 돌아감으로써 전쟁을 수행할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 때가 194265일이었다. 이로써 전쟁의 주도권은 미국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일본의 모든 전선(戰線)은 붕괴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은 본토결전’(本土決戰)을 호언장담하면서 가미카제’(神風)라는 특공대까지 투입하였지만 미국을 당할 수가 없었다. 더 나아가, 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의 승리의 결정적인 계기는 미 영 연합군(총사령관 아이젠하워 장군)에 의한 194466일의 노르망디(Normandy) 상륙작전의 성공이었다. 작전명 오버로드’(Operation Overlord)! 연합국이 이 작전에 성공함으로써 독일본토를 진격하기 위한 발판이 마련되었다.

 

 

이러한 전황하에 연합국 측이 여러 차례 일본에 항복할 기회를 주었지만, 일본이 끝내 항복하지 않으므로 194586일 미국이 히로시마(廣島)꼬맹이’(Little boy)라는 이름의 원자폭탄(原子爆彈)을 투하하였다. 이로써 343,000명의 인구 중 7만여명이 사망하고 13만여명이 부상했으며, 62,000여호의 가옥이 파괴되었다. 참으로 대단한 위력이었다.

1945815일 정오, 일본 천황 히로히토(裕仁)의 떨리는 목소리로 무조건 항복이 선언되었다. 이로써 군국주의 일본이 연합국의 말발꿉아래 무릎을 꿇었다.

 

 

南北分斷悲劇, 38이 그어지다

 

 

1945815, 일본은 마침내 패망하였다. 그리고, 우리 한국은 35년간 일본의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 날은 우리에게 새로운 마음의 고통을 안겨주었다. 북위 38선으로 남과 북을 갈라놓고 말았다. 이것이 한반도(韓半島)의 새로운 비극의 단초가 되었다.

세상만사(世上萬事)가 때로는 의외성이 있게 마련인가 보다. 소련의 대일전(對日戰) 참전(參戰)이 우리에게 큰 고통의 씨앗을 잉태하게 된 것이었다. 19452, 미국 영국 소련 3국 정상들이 얄타회담(Yalta Conference)에서 독일의 패전 후 처리문제를 논의하면서 소련의 대일전 참전에 관한 협정도 이루어졌는데, 이로써 소련이 89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와 한반도를 침공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는 구실이 되었다. 남쪽에서 미국이, 북쪽에서 소련이 협공해오니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수가 없었다. 그 날, 미국이 나가사키(長崎)에 제2차로 원자폭탄을 투하함으로써 일본은 완전히 전의(戰意)를 상실하고 말았다.

일본은 이 지경에 이르게 되자 미국에 항복의 메시지를 보낸다. “천황이 국가통치권을 유지한다는 양해하에 포스탐선언을 수락한다는 것이었다. 머리를 잔뜩 조아렸다. 이에 미국은 일본정부의 국가통치권은 항복과 동시에 연합국 총사령관에게 귀속되고, 천황에 관한 것은 일본 국민의 의사에 따른다는 사실을 일본 정부에 통고하였다. 이제 일본의 선택만이 남았다. 그러나,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항복으로 몰리고 있었다. 814, 일왕은 어전회의(御前會議)를 열고 종전(終戰)을 결정하였다.

 

 

194592, 도쿄만(東京灣)에 정박 중인 미주리(Missouri) 함상(艦上)에서 연합국 사령관과 일본정부 사이에 항복문서에 조인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리고, 일본은 포스탐선언에 따르기로 하였다.

그런데, 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일본의 패망은 우리에게 새로운 불행을 잉태하게 되었다. 북위 38선 이북(以北)에는 소련군이 진주하여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825일 평양에 사령부를 설치하였으며, 이남(以南)에는 97일에 미국 극동사령부가 군정(軍政)을 선포하였다. 이는 미국 맥아더(MacArthur, D.) 사령관의 북위 38선을 경계로 하는 미 소 양국의 한반도 분할정책에 따른 것이었다. 이로써 한반도(韓半島)38선이 그어졌다. 이북은 소련군에 의한 공산주의 체제로, 이남은 미군에 의한 민주주의 체제로 나뉘어 이념을 달리하는 두 개의 체제로 출발하면서 한반도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이로써 남북이 서로 다른 이념을 가진 두 개의 나라가 건국되었으며, 그로부터 66년간 우리는 북한에게 너무나 많이 시달려왔다. 북한이 19506 25전쟁을 일으키고 불법남침(不法南侵)을 자행함으로써 남한의 온 산야(山野)를 피로 물들게 하였으며, 그 후에도 크고 작은 무력에 의한 위협을 가해왔다. 현재에도 핵()카드를 만지작거리며, ‘서울 불바다를 외치고 있다. 이것이 우리 대한민국(大韓民國)이 걸어온 국토분단(國土分斷)의 아픔이다.

 

 

그러나, 우리 대한민국은 북한의 끊임없는 도전에 굴하지 않고 민족적인 각성과 자립의지로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에 독립한 신생국가(新生國家)로서는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경이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다. 이로써 국제무대의 중심에 우뚝 서지 않았는가.

이제 우리의 화두(話頭)는 분단된 조국(祖國)의 통일(統一)이다. 우리 헌법(憲法)도 자유민주적(自由民主的) 기본질서(基本秩序)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平和的統一)이 국민적 국가적 과제임을 명시하고 있다(동법 4). 그리고, 이것이 우리 세대(世代)가 이룩해야 할 시대적 사명(時代的使命)이다. 공산집단체제(共産集團體制)하에서 신음하고 있는 북한동포(北韓同胞)를 껴안고, 한민족(韓民族)의 정통성(正統性) 위에 평화적 통일을 이룩함으로써 또 한 번 세계를 놀라게 해야 한다. 이를 위해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슬기를 모아 단결된 힘으로 통일을 성취해야 한다. 조국의 통일을 간절히 염원하면서, 이 글을 맺는다.

권용우
권용우

 lawkwon@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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